[리뷰]신문 한 장에 가려진 절망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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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에이전트>

신문 한 장에 가려진 절망을 애도하며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게 참 쉬운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살기 위해 버둥대는 사람들과 죽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생겨난 이유를 들여다보면 근원에는 역시나 욕심이 가득한 권력자가 있다. 자신이 틀어쥔 그깟 자리 하나를 지키려고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두르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인생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여느 삶이 그러하듯 단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연유도 모른 채 허물어진 그들의 삶을 두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까지 뒤집어씌우는 세상은 정말이지, 요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감독의 <시크릿 에이전트>는 세상의 부조리한 생리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고 거듭 상기시키려고 작정하고 만든 작품 같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부정한 권력에 인생 전부를 빼앗긴 한 남자의 절망스러운 마지막 길을 동행하는 듯한 느낌이 진하게 감돈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마르셀루(바그네르 모우라)를 따라간다. 신분을 버리고 종적을 감춘 채 숨죽여 살아온 그가 카니발이 한창인 고향 헤시피로 돌아오면서부터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남겨진 그의 흔적을 조명한다. 제목만 보고 필자가 멋대로 짐작한 통쾌한 복수극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주인공의 쓸쓸한 말로를 보여주며 영화는 필자에게 당혹감과 동시에 인간이 지닌 존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구)아르만두 (현)마르셀루가 맞이할 결말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적이 드문 도롯가의 주유소에 노란색 차량 한 대가 들어온다. 그 차 안에는 마르셀루가 타고 있다. 마르셀루의 눈앞에는 신문지 한 장으로 대충 덮어놓은 시신 한 구가 공터에 널브러져 있다. 죽은 지 며칠은 지난 듯 보이는 사체 주변에는 파리가 들끓고 검은 새 몇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주유소 직원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는 기름을 훔치려다가 당시 근무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참변을 당한 절도범이라고 한다. 그런데 근무자는 사고가 일어난 그날부터 어디론가 도주한 상태고 사자(死者)는 말이 없으므로 사건의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이 장면은 사고가 일어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하간 남은 직원은 사고 처리를 위해 여러 번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더 중한 사건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사건 현장에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주유소로 들어온 경찰차 한 대가 들어오지만, 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자신들의 관할 밖이라면서 썩어가는 사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유소를 지나가는 또 다른 차량에는 카니발에 들뜬 젊은이들이 타고 있는데 그들은 처량하게 누운 시체를 구경하며 깔깔대고 웃어댈 뿐이다. 생명의 고귀함 따위는 내다 버린 듯한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부정과 부패에 찌든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무장한 인간 군상의 한 단면을 찍어낸 듯 느껴진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마르셀루는 과연 얼마큼 느끼고 있었을까. 이것이 그의 마지막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예견을 말이다. 감히 상상하기가 겁날 정도로 서글픈 순간이다.

 

영화 <시크릿 에이전트>를 창작한 사람이 감독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라면 이 영화를 완성시킨 사람은 바그네르 모우라이다. 그의 경이로운 열연은 1970년대 말 브라질 군사정권 속 정치적 암투에 휘말린 한 남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바그네르 모우라는 영화에서 3명(실제로는 2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오랜 은신 생활과 끝이 없는 신변의 위협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마르셀루’와 능력을 인정받는 교수이자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던, 남 부러울 것 없이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던 ‘아르만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시간의 틈이 존재한다. 바그네르 모우라는 ‘아르만두’가 ‘마르셀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기점으로 벌어진 인물의 차이를 세밀하게 표현한다. 아내를 모욕하는 기업가에게 당당하게 맞서던 ‘아르만두’와 피로에 절어버린 얼굴 위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애써 긴장을 숨기는 ‘마르셀루’는 분명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과장을 아주 약간 보태어) 배우 한 명이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필자 개인의 의견인데, 바그네르 모우라의 얼굴에서 언뜻 일본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바그네르 모우라가 영화 전반에서 보여준, 약간 처진 눈매와 살짝 파인 눈 밑 언저리에서부터 자아내는 고독하고 처연한 중년 남성의 분위기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기한 가후쿠의 그것과 닮아있다. 배우의 타고난 얼굴인지 아니면 만들어낸 표정인지 알 길은 없지만 바그네르 모우라의 얼굴에서부터 그의 삶에 잔뜩 낀 피곤함과 불안함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성인이 된 아르만두의 아들 페르난두 또한 바그네르 모우라가 연기하는데, 이 설정 또한 너무도 좋았다. 아버지의 얼굴과 판박이인 아들이지만 너무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를 아버지라 여기며 자라온 페르난두에게 친부를 추억하는 것이 어색하고 난감할지도 모른다. 피로 이어진 관계임에도 그가 자라온 시간 속에 부재했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페르난두를 향한 마르셀루의 들끓는 부성애를 목격했던 한 명의 관객으로서 페르난두의 아비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에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느껴진다.

 

마르셀루의 은신 기간 중 그의 망명을 도와주려던 조력자들과 나눈 대화는 녹취자료로 남겨졌고, 그의 사망 사건은 당시 신문 한 면에 짧은 기사 몇 줄로 새겨졌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비극적인 삶은 ‘아르만두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과거 속에 파묻힌 남자의 일생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다는 것에 필자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당시에는 무력했을지라도 기록은 세대에 걸쳐 전수되며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아마 그들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치졸한 협잡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주유소 앞마당에 방치되었던 이름 모를 시신과 달리, 마르셀루 사건의 진상은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길이길이 살아남아 끝끝내 저항의 들불을 지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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