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센티멘탈 밸류>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맺어진 관계는 어쩌면 한 인간이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의 영역일 것이다. 혈혈단신 지구상에 떨어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이 세상의 이치에 눈을 뜨고 그것을 흡수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은 그의 인생에 기꺼이 동행하며 그들이 보고 배운 세상을 알려준다. 가정을 두고 울타리에 종종 빗대어 표현하는 까닭은 외부의 온갖 낯선 것들로부터 그 안에 속한 자들을 보호하고, 우리라는 끈끈한 소속감을 매개로 그 안에 속한 자들을 결속시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울타리라는 단어가 내뿜는 인상에는 포근함과 안락함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반강제적인 공유 상태로 함께 보낸 세월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 전반에 내 가족들의 영향받으며 성장한다.
그래서일까. 가족 안에 단단히 새겨진 사랑의 총체 안에는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꽤 거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가족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깊은 상처를 업신여기고 이미 지나버린 별일 아닌 일로 치부하는 가볍고도 치사한, 불공평과 불공정과 비정함의 온상을.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이해해야 마땅할 존재들의 차디찬 외면에 한없이 깊은 바닥 아래로 처박혀버린 듯한 절망을. 정말이지 단칼에 끊어낼 수 없고 진정 끊어내고 싶은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의 존재, 징그럽게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영화 <센티멘탈 밸류>가 보여준 가족의 이야기는 이처럼 필자가 묵혀둔 가족을 향한 질퍽한 증오와 다디단 행복이 혼재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가족 간의 갈등을 통해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결국 가족이기에 나누고야 마는 마음에 대하여 관객에게 속삭인다.
필자의 시선에서 영화는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를 중심에 두고 세대와 시간을 관통한다. 구스타브는 그의 어머니 카린과 그의 첫째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 사이에서 선대로부터 흘러내린 상처의 기억을 후대에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그리는 구스타브의 집안 내력에는 스산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죽음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한 생명이 사그라들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이러한 감각은 어쩌면 대를 이어오는 상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카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 활동 중 수감당해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영화가 조명하는 중심인물인 노라는 그녀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는 부모의 첨예한 갈등과 그로 인해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불안을 겪고 있다. 구스타브는 직계 혈통으로 묶인 두 여인이 지닌 삶의 어둠에 영향받았고 동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여배우가 던지는 카린에 대한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 감독 구스타브, 자신을 바라보는 원망 섞인 노라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해대는 무정한 아버지 구스타브 등)을 토대로 구스타브의 일대기를 상상해 보자면, 그의 생은 자신의 앞에 선 여성(카렌)과 자신의 뒤에 선 여성(노라)이 겪어낸 고통의 연결고리처럼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관문 삼아 이어 붙여 전승된 상흔은 분명 구스타브의 일생에도 스며들었을 것이리라.
이러한 연유로 구스타브는 세대를 이어온 기억(상실의 아픔과 위기에 대한)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 큰딸을 위해 썼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구스타브의 각본은 바로 그 자신을 위해 써 내려간 이야기라고 본다. 물론, 구스타브의 각본에 대해 필자가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필자도 확신하기 어려운 단순한 추측일 뿐이다. 도대체 구스타브는 그를 중심으로 이어진 두 여인을 통해서 그의 삶을 관통한 죽음의 기억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삶에 지겹게도 영향을 주는 두 여인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자신도 상처받았노라며 누군가에게 위로받기 위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근본의 이유는 지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필자는 구스타브의 새 각본의 의미가 젊은 날 애써 외면하며 미완으로 남겨둔 삶의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선 무렵, 검은 배경 위로 구스타브, 노라, 아그네스의 얼굴이 차례로 겹쳐 나오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압권인 부분이라 자부한다. 시계방향으로 음영이 이동할 때마다 구스타브의 얼굴 위로 노라의 얼굴이 겹치고, 이어서 아그네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세 사람의 얼굴이 교차하는 가운데 필자는 은연중에 카린의 얼굴을 발견한다. 반복되는 얼굴의 전환 속에서 세 사람(혹은 네 사람)의 얼굴이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관객에게 대놓고 제공한 장면이라고 본다. 자신이 만든 이 영화는 이렇게 보셔요, 라고. 그러니까 자신의 영화는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혈연)이자 한 개인의 내면에 자리한 다양한 얼굴을 표현하고 있음을 이 장면을 통해 노골적으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나의 배경 위로 뒤섞이는 얼굴을 보며 구스타브 집안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모여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깨닫는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받기도, 때로는 누군가의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보살피기도 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세 사람이 얼굴이 겹치는 한순간에 깨달아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는 구스타브와 그의 혈육들이 6세대를 걸쳐 빚어낸 애증의 순환을 그들이 함께 보낸 저택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한다. 세대를 이어 지내온 저택은 완벽하지 않더라고 충분히 채워진 넉넉함을 원하였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외롭고 괴로울 인간의 삶에 의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일대기를 지탱해 온 그 집은 존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자신들의 집을 본떠 지은 영화 세트장 안, 감독과 연기자의 자리에서, 먼발치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노라와 구스타브.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이 바로 그런 감정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기어코 자기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지나온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과 같은 순간 속에서 어제의 우리는 아팠음에도 내일의 우리는 어쩌면 즐거울지도 모른다는 오늘의 우리 실없는 희망을 기대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살짝 피어난 미소에 그들의 홀가분한 내일을 응원하고야 만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센티멘탈 밸류>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맺어진 관계는 어쩌면 한 인간이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의 영역일 것이다. 혈혈단신 지구상에 떨어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이 세상의 이치에 눈을 뜨고 그것을 흡수할 수 있을 때까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은 그의 인생에 기꺼이 동행하며 그들이 보고 배운 세상을 알려준다. 가정을 두고 울타리에 종종 빗대어 표현하는 까닭은 외부의 온갖 낯선 것들로부터 그 안에 속한 자들을 보호하고, 우리라는 끈끈한 소속감을 매개로 그 안에 속한 자들을 결속시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울타리라는 단어가 내뿜는 인상에는 포근함과 안락함만이 있는 건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반강제적인 공유 상태로 함께 보낸 세월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 전반에 내 가족들의 영향받으며 성장한다.
그래서일까. 가족 안에 단단히 새겨진 사랑의 총체 안에는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꽤 거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가족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신의 깊은 상처를 업신여기고 이미 지나버린 별일 아닌 일로 치부하는 가볍고도 치사한, 불공평과 불공정과 비정함의 온상을.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이해해야 마땅할 존재들의 차디찬 외면에 한없이 깊은 바닥 아래로 처박혀버린 듯한 절망을. 정말이지 단칼에 끊어낼 수 없고 진정 끊어내고 싶은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의 존재, 징그럽게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영화 <센티멘탈 밸류>가 보여준 가족의 이야기는 이처럼 필자가 묵혀둔 가족을 향한 질퍽한 증오와 다디단 행복이 혼재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가족 간의 갈등을 통해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결국 가족이기에 나누고야 마는 마음에 대하여 관객에게 속삭인다.
필자의 시선에서 영화는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를 중심에 두고 세대와 시간을 관통한다. 구스타브는 그의 어머니 카린과 그의 첫째 딸 노라(레나테 레인스베) 사이에서 선대로부터 흘러내린 상처의 기억을 후대에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그리는 구스타브의 집안 내력에는 스산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죽음의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한 생명이 사그라들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돈다. 이러한 감각은 어쩌면 대를 이어오는 상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카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 활동 중 수감당해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영화가 조명하는 중심인물인 노라는 그녀의 유년 시절을 지배하는 부모의 첨예한 갈등과 그로 인해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불안을 겪고 있다. 구스타브는 직계 혈통으로 묶인 두 여인이 지닌 삶의 어둠에 영향받았고 동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여배우가 던지는 카린에 대한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 감독 구스타브, 자신을 바라보는 원망 섞인 노라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해대는 무정한 아버지 구스타브 등)을 토대로 구스타브의 일대기를 상상해 보자면, 그의 생은 자신의 앞에 선 여성(카렌)과 자신의 뒤에 선 여성(노라)이 겪어낸 고통의 연결고리처럼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관문 삼아 이어 붙여 전승된 상흔은 분명 구스타브의 일생에도 스며들었을 것이리라.
이러한 연유로 구스타브는 세대를 이어온 기억(상실의 아픔과 위기에 대한)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 큰딸을 위해 썼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구스타브의 각본은 바로 그 자신을 위해 써 내려간 이야기라고 본다. 물론, 구스타브의 각본에 대해 필자가 위와 같이 생각하는 이유는 필자도 확신하기 어려운 단순한 추측일 뿐이다. 도대체 구스타브는 그를 중심으로 이어진 두 여인을 통해서 그의 삶을 관통한 죽음의 기억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삶에 지겹게도 영향을 주는 두 여인을 이해하기 위해서인지 자신도 상처받았노라며 누군가에게 위로받기 위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근본의 이유는 지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필자는 구스타브의 새 각본의 의미가 젊은 날 애써 외면하며 미완으로 남겨둔 삶의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선 무렵, 검은 배경 위로 구스타브, 노라, 아그네스의 얼굴이 차례로 겹쳐 나오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압권인 부분이라 자부한다. 시계방향으로 음영이 이동할 때마다 구스타브의 얼굴 위로 노라의 얼굴이 겹치고, 이어서 아그네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세 사람의 얼굴이 교차하는 가운데 필자는 은연중에 카린의 얼굴을 발견한다. 반복되는 얼굴의 전환 속에서 세 사람(혹은 네 사람)의 얼굴이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착각마저 든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관객에게 대놓고 제공한 장면이라고 본다. 자신이 만든 이 영화는 이렇게 보셔요, 라고. 그러니까 자신의 영화는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혈연)이자 한 개인의 내면에 자리한 다양한 얼굴을 표현하고 있음을 이 장면을 통해 노골적으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나의 배경 위로 뒤섞이는 얼굴을 보며 구스타브 집안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모여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는 감각을 깨닫는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받기도, 때로는 누군가의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보살피기도 하는 삶의 아이러니를 세 사람이 얼굴이 겹치는 한순간에 깨달아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영화는 구스타브와 그의 혈육들이 6세대를 걸쳐 빚어낸 애증의 순환을 그들이 함께 보낸 저택의 이미지를 통해 은유한다. 세대를 이어 지내온 저택은 완벽하지 않더라고 충분히 채워진 넉넉함을 원하였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외롭고 괴로울 인간의 삶에 의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일대기를 지탱해 온 그 집은 존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자신들의 집을 본떠 지은 영화 세트장 안, 감독과 연기자의 자리에서, 먼발치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노라와 구스타브.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이 바로 그런 감정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기어코 자기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지나온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과 같은 순간 속에서 어제의 우리는 아팠음에도 내일의 우리는 어쩌면 즐거울지도 모른다는 오늘의 우리 실없는 희망을 기대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살짝 피어난 미소에 그들의 홀가분한 내일을 응원하고야 만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