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물의 연대기> 리뷰 : 고통받은 기억이여, 부디 시간의 흐름 속에 씻겨나가길

fa5b766ca2e6f.png


<물의 연대기>

고통받은 기억이여, 부디 시간의 흐름 속에 씻겨나가길


여느 때와 같이 하루를 보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느 날, 문득 지금껏 지나온 일생을 돌아볼 때가 있다. 불쑥 솟구치는 기억의 파편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찌를 때면 과거 속에 파묻은 그 시절의 한 대목이 제멋대로 눈앞을 가로막곤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로부터 떠오른 이야기의 대다수는 플래시가 한 번 터질 때 나타나는 잔상처럼 금세 허공으로 산개한다. 시야를 가렸던 기억이 흩어지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보통의 일상으로 재빨리 복귀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적 상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무시하고 넘길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기억이 솟아오를 때면 그것의 무게에 압도되어 잠시 일상의 시간을 멈추고, 깊은 추억에 잠겨 버릴 수밖에 없다. 고구마 줄기 잡아당기듯 한 번 빠진 상념은 세월의 힘을 빌려 덮어둔 온갖 에피소드를 끄집어내고, 이리저리 널브러진 기억의 편린들은 기어코 그때 그날의 이야기로부터 기인한 현재의 자기 자신을 찬찬히 훑어보게 만든다.

 

영화 <물의 연대기>는 리디아(이모겐 푸츠)의 기억을 헤집으며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유년 시절로부터 이어지는 그녀의 방황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한다. 어린 리디아의 기억은 통제광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가학적인 성정에 억눌린 어머니는 어떠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언니 클로디아(소라 버치)마저 아버지의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난다. 언니의 부재 이후, 아버지의 성적 학대는 기어코 리디아로 향한다. 어린 딸을 끼고 앉아 야릇한 신음을 내뱉는 아버지의 반쯤 가린 실루엣에 혐오감이 피어난다. 곰팡이가 잔뜩 일어난 지하실의 쿰쿰하고 음산한 기운 속에서 치욕을 당하던 리디아의 무감각한 얼굴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은 리디아가 통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녀의 내면에 질퍽하게 달라붙어 쉽사리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화자(리디아)가 떠올리는 과거의 장면들을 화면으로 옮기는 데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빛바랜 필름처럼 닳고 해진 기억의 조각들, 시간의 앞뒤가 뒤죽박죽 섞인 현상, 예전 일이 겹쳐 보이는 비슷한 상황들이 스크린 앞에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장면들은 관객에게 마치 화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감각을 선사한다. 관객들이 리디아의 기억을 보는 시간 속에서 타인의 내밀한 비밀을 은밀하게 훔쳐보는 배덕감과 동시에 그들이 생애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리디아의 삶에는 물과 글이 있었다. 물속에서의 시간은 어린 리디아의 유일한 해방구였고, 아버지로부터 물리적으로 도망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리디아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그녀의 불안과 고통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리디아의 몸짓은 한없이 자유롭고, 글로 써 내려가는 리디아의 손길 위로 그녀의 속내를 끝없이 채굴한다.

 

물과 함께한 시간과 이야기를 지어낸 시간으로 리디아의 삶에 깊게 새겨진 생채기가 한 번에 치유되었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었을까. 애석하게도 리디아가 배운 애정과 관심은 사랑의 겉피를 쓴 폭력만이 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리디아는 고통 없는 시간을 견뎌내기 힘들어한다. 술과 마약에 의존하며 무의미한 향락에 자신을 밀어 넣는가 하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중 리디아의 첫 번째 남편 필립(얼 케이브)과의 일화는 필자의 마음에 가장 슬픈 장면으로 기억된다. 대학 시절, 잔뜩 술에 취한 리디아는 동상 위에 올라타 고성과 행패를 부리고 있다. 바로 그 아래에서 필립은 기타를 치며 감미로운 노래를 부른다. 리디아는 사랑으로 가득한 필립의 부드러운 노랫말을 무시한 채 필립의 머리 위로 침을 뱉는다. 온전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의 부재 탓일까. 필립의 다정함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리디아가 너무도 안쓰러운 순간이다.

 

가슴 깊숙이 자리한 리디아의 고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리디아는 고통받은 기억 속에 매여있지 않으려 하염없이 팔을 뻗어내고 다리를 파닥댄다. 글을 쓰는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진실한 사랑을 알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 중독과 자기 파괴를 극복한 리디아의 얼굴에 마침내 평안이 자리 잡는다.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호숫가에서 물놀이하는 리디아를 보며 필자도 모르는 새에 얼굴에 미소가 드리운다. 이야기가 끝을 맞이할 무렵, 영화의 첫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타일 바닥에 쏟아지던 물줄기는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고, 흐르는 물 위로 번진 선혈도 이내 물의 흐름에 따라 배수구 아래로 자취를 감추어 간다. 그 장면의 잔상에서 필자는 영화가 이 물과 피가 흘러내리는 이미지로 리디아를 은유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피 흘린 시간은 분명, 괴롭고 아픈 시간이었으리라. 죽음의 어두운 기운에 잠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통받은 기억에 고여있지만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에 심신을 내맡기고 유영한다면, 물과 함께 씻겨 내려간 혈흔처럼 언젠가 고통의 기억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세월 앞에 깎여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내걸어 본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강릉씨네마떼끄 |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25540)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경강로 2100 (임당동, 신영빌딩2) 4층

대표자: 권정삼 

사업자등록번호: 226-82-61420

TEL: 033-645-7415 

FAX: 033-644-7415

E-MAIL: gncinematheque@gmail.com

Copyright©강릉씨네마떼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