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화양연화 특별판> 리뷰 : 감정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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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특별판>

감정의 흔적


어떤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서 선명해진다. 쌓여가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대신, 오히려 이야기가 남아 오래 머무는 것이다. <화양연화>는 그런 영화다. 곱씹을수록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여운이 남아 자꾸 생각나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좁은 아파트에 두 부부가 동시에 이사를 온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서로의 옆집으로 부산히 짐을 옮기는 와중에 몇 번이나 물건이 섞여 돌려줘야만 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쑤(장만옥)와 차우(양조위)는 자연스럽게 안면을 튼다. 이들에게 벌어질 일은 생각하지 못한 채, 아파트의 벽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기묘한 인연이 맺어진다.

 

영화를 잘 모르는 이라도 <화양연화>라는 제목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반복해서 회자되는 이유는 서사보다도 그 여백에 있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 끝내 확인되지 않는 관계, 그리고 멈춘 듯 반복되는 시간들. 영화는 이 여백을 채우기보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미 완성된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의 밀도를 다르게 만드는 것이다.

 

쑤와 차우의 결정적인 관계 변화는 두 사람의 배우자 외도 때문이었다. 쑤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는 눈이 맞아 가정에 소홀했고, 홀로 저녁을 때우기 위해 아파트 밑 국수 가게를 자주 찾던 쑤와 차우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해 보고자 함께 저녁을 보내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식당에서 각자의 배우자 외도를 주제로 대화하며, 두 사람의 옷차림 변화로 이 만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왕가위 감독의 절제되고도 세련된 연출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관계의 특이점은 쑤와 차우가 만남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밀한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을 잡는 것이 고작이며 자신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스스로 이유를 붙여가며 설명하려 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올 정도로 강박적으로 자신들의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에서 기저에 깔린 두려움이 느껴진다. 이들이 끝까지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는 도덕적 이유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쑤와 차우는 자신들이 상대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 그 감정이 어디까지 자라날 수 있는지를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조심스럽게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길 미룬다. 한 번 허락해버리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 그 순간 이후에는 ‘그들’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이 관계를 끊임없이 붙잡아버렸다. 이런 모호하고 경계가 불분명한 두 사람의 감정은 보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게 만들고, 저마다의 <화양연화>를 완성시킨다.

 

이별을 선언하지도,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은 채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던 두 사람의 결말은 뻔했다. 각자의 시간으로 흩어지는 것.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쑤를 위해 차우는 떠나는 길을 택했고, 서로 나와 같이 가겠냐는 말은 전하지 못한 채 이별했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결국 쑤와 차우에게 남은 건 감정의 흔적뿐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이르는 화양연화, 이들의 화양연화를 함께 좇은 관객들 역시 그 흔적이 남아버렸다. 묘한 찝찝함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감정들이 한데 모여 잘 지워지지도 않는 그 흔적이, 긴 시간 동안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 관객리뷰단 서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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