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그리고 둘>
뒷면을 볼 수 없을지라도
영화가 끝이 나고, 검은 화면 위로 모로 누운 일자(一)가 먼저 화면 중앙에 드러난다. 이어서 바로 그 아래에 또 다른 일자가 떠오르며 두 이(二)를 나타낸다. 홀로 누워있던 막대기 아래에 그저 막대기 하나를 더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화면이 내뿜는 안정감이 배가 된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가 보다. (애석하게도 하나만도 못한 둘이 종종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두 이(二)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일렬로 선 두 사람이 연상된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다면, 뒤에 선 자는 앞에 선 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 인간에게 그가 볼 수 없는 이면을 알려주는 존재가 있다면,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조금이나마 평안을 얻지 않으려나 싶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이 새겨지는 순간, 감독 에드워드 양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 각인되었다.
(아마도)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미래는 한결같이 불확실하고 인간이 살아내는 세상은 변함없이 불공평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할 따름이다. 양양(조나단 창)의 삼촌 아디(진희성)가 길일(吉日)에 결혼식을 올렸건만, 예식장에서부터 소란이 일더니 그 여파 때문인지 양양의 가족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잇따른다. 양양의 할머니(유엔 탕)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 길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양양의 아빠 NJ(오념진)은 식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옛 연인 셰리(가소운)와 조우하고 난 후부터 직장 안팎에서 골치 아픈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양양의 엄마 민민(금연령)은 할머니의 사고 이후 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몰려오는 삶의 허무함을 주체 못 하고 수양을 핑계로 집을 떠난다. 양양의 누나 팅팅(켈리 리)은 자신의 부주의로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죄책감에 불면증을 앓고 있다. 게다가 옆집으로 이사 온 리리(애드리안 리)의 복잡한 연애사에 휘말려 속앓이로 고생한다. 언제나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일상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시련의 소용돌이에 인간은 그저 속절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 숙명은 뒤에서부터 날아오기에 피할 재간이 없다던데, 인간의 눈이 뒤에도 달려 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는 덜 고통받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양양의 가족에게 벌어진 에피소드 중 NJ의 사연에 가장 마음이 간다. 집안에 닥친 비극과 회사의 곤경 속에서 NJ는 필시 갑갑함을 느꼈으리라. 가장의 책임은 나날이 무거워지고 회사에서의 입지는 위태로우리만큼 좁아질 뿐이다. 그런데 NJ는 밝은 기운은 사라지고 서늘한 그늘만 깊이 드리운 일상을 벗어날 생각이 없나 보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열심히 살아내고만 있다. 그런데 일본인 사업가 오타(오가타 잇세이)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NJ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다. 오타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우리는 왜 처음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문장으로 기억될) 속에서 NJ는 생의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느낀 것인가? NJ는 출장을 핑계로 셰리와 일본에서 밀회를 즐긴다. 셰리의 등장을 경계하고 재회를 꺼리던 이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NJ와 셰리는 여느 연인처럼 손을 잡고 팔짱을 끼며 거리를 누빈다. 시작하는 연인들의 설렘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두 사람은 억누른 속내를 표출하며 서로의 과거를 헐뜯는다. 셰리는 NJ가 떠난 이후 고통받은 세월을 토해내고, NJ는 자신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려고 했던 셰리의 언행을 비난한다. 다정함과 냉랭함이 교차하는 대화의 끝에서 셰리는 NJ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린다. 흐느끼는 셰리를 껴안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지만 NJ는 셰리의 애원에 끝내 답하지 못한다. 도시의 밤을 밝히는 불빛을 배경으로 유리창 위로 투영된 깊은 포옹을 나누는 두 남녀의 실루엣이 공허한 외로움을 자아낸다.
새 인생을 기대하며 무작정 떠나왔건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번에는 셰리가 먼저 NJ를 떠난 모양이다. 아무 말도 없이 호텔방을 비우고 사라진 셰리가 옛 연인에게 남겨둔 전언은 없었다. 홀로 침대에 걸터앉은 NJ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시간을 들여 응시한다. 타인의 의지에 등 떠밀려 마지못해 살고 있다고 자조했던 지금 자기의 모습이 결국, 제 손으로 잡은 선택지가 빚어낸 결과임을 깨닫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NJ 외의 다른 가족들의 에피소드들도 그들이 기대했을 것만 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도출하지 못한다. 영화는 모두가 한 스푼 정도의 씁쓸함을 삼켜야만 하는 결말을 각자에게 제공한다. 민민은 수양하는 동안 별다른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팅팅은 타인의 치정에 얽혀 친구도 잃고 연인도 잃는다. 할머니는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감독 에드워드 양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 양양의 가족들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한 듯 보인다.
결혼식에서 시작된 영화의 이야기는 장례식에서 끝을 맺는다. 한 생명의 마지막을 위로하고 그리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양양은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서서 공책에 적어 온 글을 읽는다. 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뒷모습을 알려주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받은 카메라로 무수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어온 양양. 뒷면을 알 수 없는 불안전한 상태이더라도, 괜찮다. 불확실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우리들 아닌가. 그러니, 삶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온갖 비극적인 순간을 슬프게만 볼 일은 아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뒷면의 세계는 분명 나와 함께 우리가 된 이들이 보완해 주리라. 에드워드 양이 선사한 삶의 살아내는 우리를 위해 정성스레 빚어준 한 편의 영화. 극 중 패티가 팅팅에게 알려준 ‘영화가 생겨난 후로 인간의 수명은 3배 늘어났다’라는 말처럼 이 영화를 보는 시간으로 인해 필자의 삶은 이전보다 풍성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하나 그리고 둘>
뒷면을 볼 수 없을지라도
영화가 끝이 나고, 검은 화면 위로 모로 누운 일자(一)가 먼저 화면 중앙에 드러난다. 이어서 바로 그 아래에 또 다른 일자가 떠오르며 두 이(二)를 나타낸다. 홀로 누워있던 막대기 아래에 그저 막대기 하나를 더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화면이 내뿜는 안정감이 배가 된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가 보다. (애석하게도 하나만도 못한 둘이 종종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두 이(二)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일렬로 선 두 사람이 연상된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다면, 뒤에 선 자는 앞에 선 자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진실이라고 믿는 인간에게 그가 볼 수 없는 이면을 알려주는 존재가 있다면,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조금이나마 평안을 얻지 않으려나 싶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이 새겨지는 순간, 감독 에드워드 양이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 각인되었다.
(아마도)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미래는 한결같이 불확실하고 인간이 살아내는 세상은 변함없이 불공평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할 따름이다. 양양(조나단 창)의 삼촌 아디(진희성)가 길일(吉日)에 결혼식을 올렸건만, 예식장에서부터 소란이 일더니 그 여파 때문인지 양양의 가족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잇따른다. 양양의 할머니(유엔 탕)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그 길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양양의 아빠 NJ(오념진)은 식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옛 연인 셰리(가소운)와 조우하고 난 후부터 직장 안팎에서 골치 아픈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양양의 엄마 민민(금연령)은 할머니의 사고 이후 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몰려오는 삶의 허무함을 주체 못 하고 수양을 핑계로 집을 떠난다. 양양의 누나 팅팅(켈리 리)은 자신의 부주의로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죄책감에 불면증을 앓고 있다. 게다가 옆집으로 이사 온 리리(애드리안 리)의 복잡한 연애사에 휘말려 속앓이로 고생한다. 언제나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일상의 근간을 흔들어대는 시련의 소용돌이에 인간은 그저 속절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 숙명은 뒤에서부터 날아오기에 피할 재간이 없다던데, 인간의 눈이 뒤에도 달려 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는 덜 고통받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양양의 가족에게 벌어진 에피소드 중 NJ의 사연에 가장 마음이 간다. 집안에 닥친 비극과 회사의 곤경 속에서 NJ는 필시 갑갑함을 느꼈으리라. 가장의 책임은 나날이 무거워지고 회사에서의 입지는 위태로우리만큼 좁아질 뿐이다. 그런데 NJ는 밝은 기운은 사라지고 서늘한 그늘만 깊이 드리운 일상을 벗어날 생각이 없나 보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열심히 살아내고만 있다. 그런데 일본인 사업가 오타(오가타 잇세이)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NJ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다. 오타와 술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우리는 왜 처음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문장으로 기억될) 속에서 NJ는 생의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느낀 것인가? NJ는 출장을 핑계로 셰리와 일본에서 밀회를 즐긴다. 셰리의 등장을 경계하고 재회를 꺼리던 이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NJ와 셰리는 여느 연인처럼 손을 잡고 팔짱을 끼며 거리를 누빈다. 시작하는 연인들의 설렘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두 사람은 억누른 속내를 표출하며 서로의 과거를 헐뜯는다. 셰리는 NJ가 떠난 이후 고통받은 세월을 토해내고, NJ는 자신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려고 했던 셰리의 언행을 비난한다. 다정함과 냉랭함이 교차하는 대화의 끝에서 셰리는 NJ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린다. 흐느끼는 셰리를 껴안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지만 NJ는 셰리의 애원에 끝내 답하지 못한다. 도시의 밤을 밝히는 불빛을 배경으로 유리창 위로 투영된 깊은 포옹을 나누는 두 남녀의 실루엣이 공허한 외로움을 자아낸다.
새 인생을 기대하며 무작정 떠나왔건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번에는 셰리가 먼저 NJ를 떠난 모양이다. 아무 말도 없이 호텔방을 비우고 사라진 셰리가 옛 연인에게 남겨둔 전언은 없었다. 홀로 침대에 걸터앉은 NJ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시간을 들여 응시한다. 타인의 의지에 등 떠밀려 마지못해 살고 있다고 자조했던 지금 자기의 모습이 결국, 제 손으로 잡은 선택지가 빚어낸 결과임을 깨닫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NJ 외의 다른 가족들의 에피소드들도 그들이 기대했을 것만 같은 긍정적인 변화를 도출하지 못한다. 영화는 모두가 한 스푼 정도의 씁쓸함을 삼켜야만 하는 결말을 각자에게 제공한다. 민민은 수양하는 동안 별다른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팅팅은 타인의 치정에 얽혀 친구도 잃고 연인도 잃는다. 할머니는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감독 에드워드 양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 양양의 가족들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한 듯 보인다.
결혼식에서 시작된 영화의 이야기는 장례식에서 끝을 맺는다. 한 생명의 마지막을 위로하고 그리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양양은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 서서 공책에 적어 온 글을 읽는다. 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뒷모습을 알려주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받은 카메라로 무수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어온 양양. 뒷면을 알 수 없는 불안전한 상태이더라도, 괜찮다. 불확실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우리들 아닌가. 그러니, 삶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온갖 비극적인 순간을 슬프게만 볼 일은 아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뒷면의 세계는 분명 나와 함께 우리가 된 이들이 보완해 주리라. 에드워드 양이 선사한 삶의 살아내는 우리를 위해 정성스레 빚어준 한 편의 영화. 극 중 패티가 팅팅에게 알려준 ‘영화가 생겨난 후로 인간의 수명은 3배 늘어났다’라는 말처럼 이 영화를 보는 시간으로 인해 필자의 삶은 이전보다 풍성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