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르누아르> 죽음을 먹고 자라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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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죽음을 먹고 자라난 아이


죽음(死).

세상에 태어나 호흡하는 자들이 삶의 종장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마주해야 할 자연의 섭리. 그렇지만 (적어도 필자는) 살아있는 동안 되도록 그것과는 멀리하고 싶고 구태여 그것에 관한 것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찬란하고 영롱한 빛의 현형이라면 죽어간다는 감각은 숨이 막힐 만큼 깊고 진한 어둠의 그림자를 퍼뜨린다. 호흡이 다 하고 심장이 멈춘 이후의 시간은 상상하기조차 버겁기만 하다. 그만큼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란. 그런데 감독 하야카와 치에는 필자가 이토록 애써 외면하고 있는 죽음을 기어코 직면하게 만든다. 전작 <플랜 75>에서는 초고령사회에서 생산성을 앞세워 인구 조절을 하는 국가 시스템을 통해 관객에게 존엄한 죽음이라는 과제를 고민하게 하더니, 이번 신작 <르누아르>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붕괴하는 어른들을 지켜보는 소녀를 통해 모순적이지만 ‘성장’의 순간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하야카와 치에가 엮은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또다시 벗어날 수 없는 생과 사의 굴레를 마주 보고야 만다. (이 알아차림이 참으로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싫지만은 않다.)

 

여름방학을 앞둔 11살 소녀 후키(오키타 유이)의 나날은 죽음이 에워싸고 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빠를 보고도 차분하게 구급차를 부르는 후키를 보고 있노라면 죽음이 얼마만큼 오랜 기간 후키의 지근거리에 머물러 있었을지 짐작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을 상상하며 쓴 글을 학우들 앞에서 발표하는 후키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당혹감이 밀려온다.

 

“사람이 죽으면 운다. 그 눈물은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일까? 아니면 남겨진 자신이 불쌍해서일까?”

 

작문을 통해 후키가 던진 이 질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감상을 지배한다. 애도의 시간이 어디로 향해야 마땅한 것인지 고민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죽음의 서늘한 기운이 일상을 잠식하는 동안 후키의 부모는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말기 암 환자인 아빠 케이지(릴리 프랭키)의 병세는 더 이상 호전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오랜 병간호에 지쳐 히스테리만 남은 엄마 우타코(이시다 히카리)는 외도에 빠진다. 살 수 있다는 기대가 헛된 희망이 되어버린 아빠와 사랑받고 있다는 설렘에 속아 치욕을 뒤집어쓴 엄마. 부모의 절망을 지켜보고 있지만 후키는 그들의 상심에는 동화되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후키는 여름의 싱그러운 자유를 만끽하며 새로운 만남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후키가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은 모두 외로움에 잠식되어 있다. 그들은 후키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의 외로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우연한 계기로 이웃 쿠리코(카와이 유미)의 집에 방문한 후키는 TV에서 본 장면을 따라 그녀에게 최면을 건다. 쿠리코는 최면을 핑계 삼아 죽은 남편에 대한 복잡한(죄책감과 역겨움이 혼재한) 감정을 토해낸다. 영어교습소에서 사귄 친구와 그녀의 부모(특히, 친구의 엄마)는 후키가 친구의 집을 방문한 것을 계기(후키가 발견한 외도 사진)로 애정 없이 버텨온 가정을 마침내 무너뜨린다. 두 번의 만남을 지켜보며 후키가 외로운 이들과 자기 가족을 겹쳐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마냥 설레고 즐거워할 줄만 알았던 후키의 얼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묻어난다. 폰팅을 통해 알게 된 카오루(반도 료타)의 집에서 카오루의 엄마를 피해 뒷문으로 쫓겨난 후키. 이후 후키가 꾼 꿈(비에 젖은 후키의 몸을 건강한 아빠가 닦아주는 장면)을 통해 후키에게 드리운 그 슬픔이 외로움이었음을 알아차린다.

 

영화에서 필자의 인장에 박힌 장면은 후키와 아빠의 나들이 신이다. 후키는 복수가 가득 찬 아빠 케이지를 부축하듯 그의 손을 잡고 걷다가 학교 친구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손을 빼 길가의 들풀을 보는 체한다. 후키는 친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빠에게 달려가 다시 그의 손을 움켜쥔다. 마지막이 나들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 속에서 아픈 아빠가 창피하지만 그래도 함께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렇게 후키의 여름방학은 아빠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만약 아빠를 다시 만나면 무어라 말하고 싶냐는 질문에 ‘오랜만이야’라고 말하겠다는 후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다행스러운 미소가 감돈다. 진짜 죽음을 경험한 순간, 마땅히 슬퍼한 순간, 후키의 꿈에서 마침내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물러난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선상 파티를 즐기는 후키의 상상처럼 여름날 애도의 시간이 소녀를 보다 반짝거리게 연단하였음을 믿어보고 싶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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