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이다. 옛 성현의 가르침이 아직도 우리의 일생에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타인에 대한 배려 넘치는 공감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역지사지의 정신은 저 멀리 내던진 채 그 잘난 예술을 한답시고 한 여인의 존엄을 무너뜨린 감독과 배우가 있다. 업계에서 이름 좀 날리고 있던 고명하신 두 남자는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을 영화에 불어넣는 것에 혈안이 되어 피사체에 남을 상처 따위는 염려하지 않는다. 나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화면에 담길 피사체에 약간의 흠집이 남는 것 정도야 큰일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고통받은 그 여인은 피사체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꿈 많고 열정 넘치던 청춘의 한 자락을 이제 막 엮어나가던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에서의 탱고>(1972년) 촬영 현장에서 뒤집어쓴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발버둥 친 수많은 시간에 대한 기록을 대변한다. 예술을 무기 삼아 제멋대로 휘두른 모멸에 무참히 짓밟힌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영화는 <파리에서의 탱고>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인 모양이다. 일선에 따르면,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2003년)의 연출부 출신인 제시카 팔뤼 감독이 각고의 노력 끝에 <파리에서의 탱고>의 원본 대본을 구했고, <파리에서의 탱고> 제작진과의 면담을 통해 촬영 당시의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감독의 집요함 덕분에 필자는 관객으로서 마치 마리아의 촬영장을 견학하는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촬영 장면을 조명하기에 앞서 영화는 마리아 슈나이더(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의 불안한 성장 배경을 간략히 소개한다. 유명 배우의 혼외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마리아는 16살이 되던 해, 영화 촬영장에서 아버지의 연기를 지켜보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몇 년 후 파리 시내의 이름 모를 카페, 조연을 전전하던 마리아는 당시 촉망받는 이탈리아 출신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주세페 마조)에게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말론 브란도(맷 딜런)와의 협업을 제안받는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남녀의 우연히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의 요동을 격렬하고 파격적인 장면으로 그려내 보고 싶다는 베르톨루치. 그의 계획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눈에는 열망과 기대가 가득 차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마리아에게 있어 베르톨루치와의 만남은 그녀가 그토록 꿈꿔온 배우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오는 순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 작업으로 그녀의 부푼 마음이 무참히 부서질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베르톨루치의 연출 지도에 귀 기울이고 말론과 합을 맞춰 연기를 수행하는 마리아의 눈은 아름답게 빛난다. 우스운 동물 연기를 요구받은 장면에서조차 마리아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다. 촬영 준비에 한창인 제작진을 뒤로한 채 말론과 흥겹게 춤을 추는 마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인다. 여느 때와 같은 촬영장,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마리아에게 베르톨루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온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면 ‘선을 넘는’ 장면이 필요하다는 감독의 모호한 주문을 마리아는 거역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며 쌓아온 감독에 대한 신뢰가 마리아를 어떠한 의심 없이 세트장으로 향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믿음을 업신여기듯 베르톨루치와 말론은 마리아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논란의 ‘버터’ 성폭행 장면을 촬영한다. 말로의 두꺼운 팔에 억눌린 채 눈물 섞인 비명을 지르는 마리아의 반응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으리라.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위해 마리아의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필요했다는 베르톨루치는 온갖 미사여구로 뒤섞인 궤변을 늘어놓고, 상대역으로 지금껏 신사다운 면모를 보여왔던 말론 역시 ‘그저 영화일 뿐이라’는 말로 공포와 수치로 널뛰는 마리아의 심정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끝끝내 마리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게 참 무서워지는 순간이다.
비참하게도 꿈 많던 소녀가 겪어야 했던 그날의 현장은 하룻밤 지나면 사라질 소동극이 아니었다. <파리에서의 탱고>는 세상에 공개됨과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선다. 평단의 상반되는 반응 속에서 베르톨루치와 말론은 영화가 빚어낸 찬사와 명성을 누린다. 밝은 면 뒤에는 언제나 어두운 면이 따라오는 법. 영화 속의 과도한 노출과 외설적인 장면에 대한 모든 비난은 오롯이 마리아에게로 향한다. 이 사태를 초래한 감독과 상대 배우는 어떠한 책임도 없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마리아는 시선에 대한 불안과 약물 중독으로 오랜 세월 고통받는다. 문제의 촬영 당시, 바닥에 눌린 채 눈물범벅이 된 마리아의 얼굴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영화는 이 장면을 재현하면서 마리아의 얼굴과 그녀를 둘러싼 제작진들의 얼굴을 교차시킨다. 수모를 당하는 여배우를 그저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금이 저려온다. 그들마저 자신들의 수행 업무를 위해 마리아에게 ‘그저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려온다. 마리아는 단지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갔을 뿐인데 말이다. 덧붙여 마리아를 둘러싼 그들의 눈빛에서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서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작금의 세태가 겹치는 건 부디 필자의 기분 탓이기를 조심스레 바랄 따름이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
진정 영화일 뿐이었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
다른 사람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이다. 옛 성현의 가르침이 아직도 우리의 일생에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타인에 대한 배려 넘치는 공감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역지사지의 정신은 저 멀리 내던진 채 그 잘난 예술을 한답시고 한 여인의 존엄을 무너뜨린 감독과 배우가 있다. 업계에서 이름 좀 날리고 있던 고명하신 두 남자는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을 영화에 불어넣는 것에 혈안이 되어 피사체에 남을 상처 따위는 염려하지 않는다. 나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화면에 담길 피사체에 약간의 흠집이 남는 것 정도야 큰일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고통받은 그 여인은 피사체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꿈 많고 열정 넘치던 청춘의 한 자락을 이제 막 엮어나가던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가 <파리에서의 탱고>(1972년) 촬영 현장에서 뒤집어쓴 치욕을 씻어내기 위해 발버둥 친 수많은 시간에 대한 기록을 대변한다. 예술을 무기 삼아 제멋대로 휘두른 모멸에 무참히 짓밟힌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영화는 <파리에서의 탱고>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데 가장 큰 공을 들인 모양이다. 일선에 따르면,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2003년)의 연출부 출신인 제시카 팔뤼 감독이 각고의 노력 끝에 <파리에서의 탱고>의 원본 대본을 구했고, <파리에서의 탱고> 제작진과의 면담을 통해 촬영 당시의 상황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감독의 집요함 덕분에 필자는 관객으로서 마치 마리아의 촬영장을 견학하는 감각을 맛볼 수 있었다. 촬영 장면을 조명하기에 앞서 영화는 마리아 슈나이더(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의 불안한 성장 배경을 간략히 소개한다. 유명 배우의 혼외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마리아는 16살이 되던 해, 영화 촬영장에서 아버지의 연기를 지켜보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몇 년 후 파리 시내의 이름 모를 카페, 조연을 전전하던 마리아는 당시 촉망받는 이탈리아 출신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주세페 마조)에게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말론 브란도(맷 딜런)와의 협업을 제안받는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남녀의 우연히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감정의 요동을 격렬하고 파격적인 장면으로 그려내 보고 싶다는 베르톨루치. 그의 계획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눈에는 열망과 기대가 가득 차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마리아에게 있어 베르톨루치와의 만남은 그녀가 그토록 꿈꿔온 배우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오는 순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 작업으로 그녀의 부푼 마음이 무참히 부서질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베르톨루치의 연출 지도에 귀 기울이고 말론과 합을 맞춰 연기를 수행하는 마리아의 눈은 아름답게 빛난다. 우스운 동물 연기를 요구받은 장면에서조차 마리아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하다. 촬영 준비에 한창인 제작진을 뒤로한 채 말론과 흥겹게 춤을 추는 마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인다. 여느 때와 같은 촬영장,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마리아에게 베르톨루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가온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면 ‘선을 넘는’ 장면이 필요하다는 감독의 모호한 주문을 마리아는 거역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며 쌓아온 감독에 대한 신뢰가 마리아를 어떠한 의심 없이 세트장으로 향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믿음을 업신여기듯 베르톨루치와 말론은 마리아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논란의 ‘버터’ 성폭행 장면을 촬영한다. 말로의 두꺼운 팔에 억눌린 채 눈물 섞인 비명을 지르는 마리아의 반응은 결코 연기가 아니었으리라.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위해 마리아의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 필요했다는 베르톨루치는 온갖 미사여구로 뒤섞인 궤변을 늘어놓고, 상대역으로 지금껏 신사다운 면모를 보여왔던 말론 역시 ‘그저 영화일 뿐이라’는 말로 공포와 수치로 널뛰는 마리아의 심정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끝끝내 마리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지 않는다. 예술이라는 게 참 무서워지는 순간이다.
비참하게도 꿈 많던 소녀가 겪어야 했던 그날의 현장은 하룻밤 지나면 사라질 소동극이 아니었다. <파리에서의 탱고>는 세상에 공개됨과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선다. 평단의 상반되는 반응 속에서 베르톨루치와 말론은 영화가 빚어낸 찬사와 명성을 누린다. 밝은 면 뒤에는 언제나 어두운 면이 따라오는 법. 영화 속의 과도한 노출과 외설적인 장면에 대한 모든 비난은 오롯이 마리아에게로 향한다. 이 사태를 초래한 감독과 상대 배우는 어떠한 책임도 없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동안 마리아는 시선에 대한 불안과 약물 중독으로 오랜 세월 고통받는다. 문제의 촬영 당시, 바닥에 눌린 채 눈물범벅이 된 마리아의 얼굴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영화는 이 장면을 재현하면서 마리아의 얼굴과 그녀를 둘러싼 제작진들의 얼굴을 교차시킨다. 수모를 당하는 여배우를 그저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금이 저려온다. 그들마저 자신들의 수행 업무를 위해 마리아에게 ‘그저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려온다. 마리아는 단지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갔을 뿐인데 말이다. 덧붙여 마리아를 둘러싼 그들의 눈빛에서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서도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작금의 세태가 겹치는 건 부디 필자의 기분 탓이기를 조심스레 바랄 따름이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