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탈리스트>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에서 내려다본 유린당한 인간의 삶
215분. 어찌하여 영화라는 대중예술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시간이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의 눈물겨운 정착기를 이야기한다. 이민자의 설움과 전쟁이 남긴 상흔을 감내하며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는 라즐로의 고군분투를 보며 새삼 '그저 묵묵히 살아냄의 위대함'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영화가 빛이 나는 여러 갈래의 순간 중에서 필자의 마음을 가장 울리는 때는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을 통해 영화가 진심과 최선을 다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물론 오감을 홀리는 촬영기법, 편집, 음향, 미술, 의상 등 열거하기에도 벅찬 영화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기반을 탄탄하게 받쳐주어야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유희적이고 감각적인 시간을 체험할 수 있다. 허나, 막상 아름다운 포장지로 감싼 선물을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 든 내용물이 형편없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포장지를 벗기는 동안 한껏 증폭된 기대감에 물을 먹이는 꼴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순간 중 하나이다. 필자의 경우 영화의 내면에서 인간을 향한 애정과 연민이 진하게 우러나올 때 만족스러운 시간을 선물 받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감동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난 것 같다.
브루탈리스트(brutalist),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융성했던 건축 양식으로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재료를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하며,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건물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 이 건축 사조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브루탈리스트는 주인공 라즐로의 삶을 관통한다. 라즐로가 유럽에서 작업한 건축물과 미국으로 건너와 생을 바쳐 완공하려는 건축물 모두 브루탈리즘이라는 맥을 같이한다. 라즐로의 건축 철학은 그의 삶에 대한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에 비친 라즐로의 시간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기 위한 사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필자가 사용한 '사투'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영화 곳곳에는 라즐로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향락가에 드나들며 성욕을 해소하고 타인의 주머니에 손을 대며 술과 약에 취해 널브러진 그의 모습에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동시에 라즐로에 대한 한없는 안쓰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온전한 정신으로 일상을 견뎌내지 못할 만큼 라즐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당해야만 했던 모진 탄압과 모멸, 생이별한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필자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추태를 두고 함부로 험담할 수가 없다. 한순간에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라즐로의 위태로움은 그가 공간을 창조하는데 할애하는 집중과 몰두로 상쇄된다. 라즐로가 공간을 구성하고 축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건물은 쌓아 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공간 안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 예술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라즐로의 예술을 향한 순도 높은 집념은 점차 본연의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인간의 순수한 의지처럼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다.'
서막의 도입부 장면에서 어두운 선실을 빠져나가는 라즐로의 뒷모습을 비추는 카메라 위로 흐르는 그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이 낭독하는 편지의 한 대목이다. 이윽고 창백하게 푸르른 하늘 위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한다. 거꾸로 매달린 듯한 여신상의 어딘지 모를 불편한 자태와는 대조된 모양새로 배경음은 기회와 자유의 땅에 당도한 군중들의 환호와 웅장한 관악기의 연주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에르제벳의 내레이션과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남긴 불안한 예감은 여지없이 라즐로의 현실로 드러난다. 영화는 라즐로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켜내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주면서 라즐로의 대척점에서 해리슨(가이 피어스)을 통해 자본의 악한 본성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해리슨이라는 인물은 마치 일그러진 가부장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해리슨의 태도는 언제나 안하무인하고 기고만장하다. 해리슨이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부리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하여, 해리슨에게 있어 라즐로는 그의 허영과 사치를 채워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도구에 불과한 라즐로가 자신의 예술 철학을 위시하며 사사건건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니 해리슨의 입장에서는 라즐로가 괘씸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해리슨에게서 흘러넘치는 지배욕과 과시욕은 라즐로의 숨통을 옥죈다. 에르제벳을 환영하는 식사자리에서 해리슨이 구두닦이 소년을 대하듯 라즐로에게 동전을 내던지는 장면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까지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채석장에서 자행한 겁탈은 도무지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이라 더 이상 해리슨에게서 인간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막강한 악당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힘없는 인간에게 무슨 기력이 남아 있겠는가. 이미 학대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는 라즐로에게 더해진 수모는 그를 더욱더 건축에 집착하게 만든다. 철골 구조물을 운동기구 삼아 턱걸이하는 인부에게 작은 결함으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다고 윽박지르는 라즐로를 보고 있자니, 신경쇠약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피폐해져 가는 라즐로의 곁에는 다행스럽게도 에르제벳이 있다. 라즐로와 에르제벳이 이민 전에 어떤 사랑을 빚어왔을지 알 길은 없지만, 라즐로를 향한 에르제벳의 사랑은 한결같다. 아무리 라즐로가 예전같이 따뜻하고 다정하지 않더라도 에르제벳은 그의 옆자리를 지켜낸다. 그리고 마침내 에르제벳의 사랑은 무너져가는 라즐로를 구출해 낸다. 에르제벳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타인의 지원 없이는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라즐로가 해리슨에게 당한 치욕을 알게 된 후, 에르제벳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자신의 두 발로 직접 걸어 해리슨의 자택을 찾아간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해야 하지만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해리슨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선 에르제벳. 그녀가 라즐로에게 범한 해리슨의 악행을 폭로하는 장면은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치부가 드러난 해리슨의 불가사의한 실종을 핑계 삼아 카메라는 수색자들의 발을 빌려 라즐로의 건축물을 이모저모 살펴본다. 온갖 방해와 멸시를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공간을 완성시킨 라즐로를 보며 에필로그에서 그의 조카 조피아가 연설했던 문구가 떠오른다.
'아무리 당신의 삶이 유린당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고난이 뒤덮여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여정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희망하며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오늘도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브루탈리스트>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에서 내려다본 유린당한 인간의 삶
215분. 어찌하여 영화라는 대중예술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시간이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의 눈물겨운 정착기를 이야기한다. 이민자의 설움과 전쟁이 남긴 상흔을 감내하며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는 라즐로의 고군분투를 보며 새삼 '그저 묵묵히 살아냄의 위대함'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영화가 빛이 나는 여러 갈래의 순간 중에서 필자의 마음을 가장 울리는 때는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을 통해 영화가 진심과 최선을 다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물론 오감을 홀리는 촬영기법, 편집, 음향, 미술, 의상 등 열거하기에도 벅찬 영화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기반을 탄탄하게 받쳐주어야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유희적이고 감각적인 시간을 체험할 수 있다. 허나, 막상 아름다운 포장지로 감싼 선물을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 든 내용물이 형편없다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포장지를 벗기는 동안 한껏 증폭된 기대감에 물을 먹이는 꼴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순간 중 하나이다. 필자의 경우 영화의 내면에서 인간을 향한 애정과 연민이 진하게 우러나올 때 만족스러운 시간을 선물 받았다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감동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난 것 같다.
브루탈리스트(brutalist),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융성했던 건축 양식으로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재료를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하며,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건물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 이 건축 사조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브루탈리스트는 주인공 라즐로의 삶을 관통한다. 라즐로가 유럽에서 작업한 건축물과 미국으로 건너와 생을 바쳐 완공하려는 건축물 모두 브루탈리즘이라는 맥을 같이한다. 라즐로의 건축 철학은 그의 삶에 대한 가치관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에 비친 라즐로의 시간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기 위한 사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직전에 필자가 사용한 '사투'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영화 곳곳에는 라즐로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향락가에 드나들며 성욕을 해소하고 타인의 주머니에 손을 대며 술과 약에 취해 널브러진 그의 모습에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동시에 라즐로에 대한 한없는 안쓰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온전한 정신으로 일상을 견뎌내지 못할 만큼 라즐로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당해야만 했던 모진 탄압과 모멸, 생이별한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필자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추태를 두고 함부로 험담할 수가 없다. 한순간에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라즐로의 위태로움은 그가 공간을 창조하는데 할애하는 집중과 몰두로 상쇄된다. 라즐로가 공간을 구성하고 축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건물은 쌓아 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공간 안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는 예술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라즐로의 예술을 향한 순도 높은 집념은 점차 본연의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인간의 순수한 의지처럼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다.'
서막의 도입부 장면에서 어두운 선실을 빠져나가는 라즐로의 뒷모습을 비추는 카메라 위로 흐르는 그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이 낭독하는 편지의 한 대목이다. 이윽고 창백하게 푸르른 하늘 위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등장한다. 거꾸로 매달린 듯한 여신상의 어딘지 모를 불편한 자태와는 대조된 모양새로 배경음은 기회와 자유의 땅에 당도한 군중들의 환호와 웅장한 관악기의 연주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에르제벳의 내레이션과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남긴 불안한 예감은 여지없이 라즐로의 현실로 드러난다. 영화는 라즐로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켜내려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주면서 라즐로의 대척점에서 해리슨(가이 피어스)을 통해 자본의 악한 본성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해리슨이라는 인물은 마치 일그러진 가부장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을 통제하고 장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해리슨의 태도는 언제나 안하무인하고 기고만장하다. 해리슨이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부리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하여, 해리슨에게 있어 라즐로는 그의 허영과 사치를 채워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도구에 불과한 라즐로가 자신의 예술 철학을 위시하며 사사건건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니 해리슨의 입장에서는 라즐로가 괘씸하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해리슨에게서 흘러넘치는 지배욕과 과시욕은 라즐로의 숨통을 옥죈다. 에르제벳을 환영하는 식사자리에서 해리슨이 구두닦이 소년을 대하듯 라즐로에게 동전을 내던지는 장면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까지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 채석장에서 자행한 겁탈은 도무지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이라 더 이상 해리슨에게서 인간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거대한 자본을 등에 업은 막강한 악당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힘없는 인간에게 무슨 기력이 남아 있겠는가. 이미 학대의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는 라즐로에게 더해진 수모는 그를 더욱더 건축에 집착하게 만든다. 철골 구조물을 운동기구 삼아 턱걸이하는 인부에게 작은 결함으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다고 윽박지르는 라즐로를 보고 있자니, 신경쇠약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피폐해져 가는 라즐로의 곁에는 다행스럽게도 에르제벳이 있다. 라즐로와 에르제벳이 이민 전에 어떤 사랑을 빚어왔을지 알 길은 없지만, 라즐로를 향한 에르제벳의 사랑은 한결같다. 아무리 라즐로가 예전같이 따뜻하고 다정하지 않더라도 에르제벳은 그의 옆자리를 지켜낸다. 그리고 마침내 에르제벳의 사랑은 무너져가는 라즐로를 구출해 낸다. 에르제벳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타인의 지원 없이는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었다. 라즐로가 해리슨에게 당한 치욕을 알게 된 후, 에르제벳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자신의 두 발로 직접 걸어 해리슨의 자택을 찾아간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해야 하지만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해리슨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선 에르제벳. 그녀가 라즐로에게 범한 해리슨의 악행을 폭로하는 장면은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치부가 드러난 해리슨의 불가사의한 실종을 핑계 삼아 카메라는 수색자들의 발을 빌려 라즐로의 건축물을 이모저모 살펴본다. 온갖 방해와 멸시를 이겨내고 기어이 자신의 공간을 완성시킨 라즐로를 보며 에필로그에서 그의 조카 조피아가 연설했던 문구가 떠오른다.
'아무리 당신의 삶이 유린당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 얼마나 많은 고난이 뒤덮여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여정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희망하며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오늘도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