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곤돌라>
이건 사랑이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스러움을 놓치지 않은 영화 <곤돌라>는 제목에 내세운 곤돌라(gondola)를 매개로 무미한 일상에 한 방울의 상큼한 자극을 선사한다. 조지아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영상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동화를 읽고 있는 듯한 감각을 체험케 한다. <곤돌라>의 독특한 미장센과 파스텔톤 색감이 구현하는 몽환적인 세계에서 약간의 노스탤지어가 떠올랐던 연유는 필자의 유년 시절에 읽어보았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이야기와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가기만 하는 회전목마의 속성을 닮아 권태롭기 짝이 없는 니노(니노 소셀리아)의 일상에 이바(마틸데 이르만)라는 변수가 나타나 버렸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변수의 개입으로 니노와 마을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의 불합리가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난다. 퍽퍽했던 니노와 이바의 나날이 서로를 만나 활기를 찾아가는, 기적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런 순간들의 파편을 모아 영화는 아기자기한 장면들로 꿰어나간다. 더불어 장면마다 느낄 수 있는 영화의 섬세한 연출은 통제와 억압에 맞서는 니노와 이바의 저항을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의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표현하여 영화의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곤돌라>의 특장점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껏 보아온 무성영화는 흑백 화면에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언어로 구성된 희극영화가 대부분이다. 필자가 쌓아온 경험들과 달리 <곤돌라>는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감으로 자연의 풍광을 선보임과 동시에 관객들이 평화로움을 잔잔하게 맛볼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올망졸망 늘어놓는다.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편중되어 곤돌라가 돌아가는 마을 속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필자에게는 휴식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니노와 이바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직관적인 감정(사랑에 가까운 호감)에 절로 마음이 녹아내렸다. 때때로 언어를 경유하지 않는 감정이 언어에 얹혀 전달되는 감정보다 더 강렬하고 명료할 수도 있다. 대사가 없이 오직 행동으로만 드러나는 니노와 이바의 교감에 기분 좋은 확신이 들게 된다.
‘아, 분명 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속이라지만 재채기와 사랑은 속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마치 두 사람과 텔레파시가 통한 것만 같은 경험(옷깃만 스쳐도 느낄 수 있는 인류 공동의 감정이 확장되는 느낌)이 만들어낸 공감이라는 감각을 농밀하게 느낄 수 있다. 니노와 이바가 곤돌라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고백에 가까운) 표현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고 따뜻하다. 종착점 한 편에 세워둔 체스판에 번갈아 가며 말을 놓으며 니노와 이바는 지루한 곤돌라의 운행에 가슴 설레는 시간을 시작한다. 서로가 타고 있는 곤돌라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마다 비행기, 자동차, 우주선, 함선 등으로 꾸민 곤돌라와 그에 걸맞은 의상과 분장으로 서로가 웃을 수 있게 애쓰는 니노와 이바의 행동을 사랑이 아니고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분명 곤돌라는 니노와 이바의 사랑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공간의 상징이다. 하지만 동시에 곤돌라는 니노와 이바의 활동반경을 제약하는 통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곤돌라에 탑승한 채 한없이 자유로이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지만 곤돌라의 관리인이 삼엄한 감시와 통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서 그린 관리인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기대할 수가 없다. 영화가 시작하는 대목에서 곤돌라에는 죽은 이의 관이 실린다. 유족으로 보이는 늙은 여인이 죽은 이가 생전에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제복을 곱게 개어 그 관 위에 올려둔다. 늙은 여인의 상심에 공감하듯 니노는 그녀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슬픔을 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진 장면에서 곤돌라에 실려 내려온 관을 장정들이 들고 갈 때 관리인이 달려와 관 위에 놓인 유니폼을 가져간다. 누군가에게 추억과 존경이 깃든 물건이 관리인에게는 비품에 불과한 것이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곤돌라의 소유권과 매출뿐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사악함에 치가 떨리는 순간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니노와 이바의 반란에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바로 매출 가방을 탈취하고 관리인 몰래 곤돌라를 운행-심지어 한밤의 파티와 협주를 곁들인-하여 관리인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핵심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관리인이 니노와 이바를 제압하려 곤돌라와 연결된 선을 끊어버렸을 때, 두 사람은 곤돌라에서 뛰어내린다. 제어를 벗어난 텅 빈 곤돌라는 관리인에게로 돌진한다. 마침내 곤돌라에서 벗어난 니노와 이바.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나란히 걸어 나가며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제아무리 찍어 내리려는 권력도 사랑이 빚어낸 과감한 행동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산골짜기 허름한 곤돌라를 사이에 두고 피어난 니노와 이바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필시 우아하고도 강력한 저항으로 기억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곤돌라>
이건 사랑이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스러움을 놓치지 않은 영화 <곤돌라>는 제목에 내세운 곤돌라(gondola)를 매개로 무미한 일상에 한 방울의 상큼한 자극을 선사한다. 조지아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영상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동화를 읽고 있는 듯한 감각을 체험케 한다. <곤돌라>의 독특한 미장센과 파스텔톤 색감이 구현하는 몽환적인 세계에서 약간의 노스탤지어가 떠올랐던 연유는 필자의 유년 시절에 읽어보았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이야기와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가기만 하는 회전목마의 속성을 닮아 권태롭기 짝이 없는 니노(니노 소셀리아)의 일상에 이바(마틸데 이르만)라는 변수가 나타나 버렸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변수의 개입으로 니노와 마을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의 불합리가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난다. 퍽퍽했던 니노와 이바의 나날이 서로를 만나 활기를 찾아가는, 기적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런 순간들의 파편을 모아 영화는 아기자기한 장면들로 꿰어나간다. 더불어 장면마다 느낄 수 있는 영화의 섬세한 연출은 통제와 억압에 맞서는 니노와 이바의 저항을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의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표현하여 영화의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곤돌라>의 특장점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껏 보아온 무성영화는 흑백 화면에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언어로 구성된 희극영화가 대부분이다. 필자가 쌓아온 경험들과 달리 <곤돌라>는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감으로 자연의 풍광을 선보임과 동시에 관객들이 평화로움을 잔잔하게 맛볼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올망졸망 늘어놓는다.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편중되어 곤돌라가 돌아가는 마을 속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필자에게는 휴식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그리고 니노와 이바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직관적인 감정(사랑에 가까운 호감)에 절로 마음이 녹아내렸다. 때때로 언어를 경유하지 않는 감정이 언어에 얹혀 전달되는 감정보다 더 강렬하고 명료할 수도 있다. 대사가 없이 오직 행동으로만 드러나는 니노와 이바의 교감에 기분 좋은 확신이 들게 된다.
‘아, 분명 저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속이라지만 재채기와 사랑은 속일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마치 두 사람과 텔레파시가 통한 것만 같은 경험(옷깃만 스쳐도 느낄 수 있는 인류 공동의 감정이 확장되는 느낌)이 만들어낸 공감이라는 감각을 농밀하게 느낄 수 있다. 니노와 이바가 곤돌라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고백에 가까운) 표현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고 따뜻하다. 종착점 한 편에 세워둔 체스판에 번갈아 가며 말을 놓으며 니노와 이바는 지루한 곤돌라의 운행에 가슴 설레는 시간을 시작한다. 서로가 타고 있는 곤돌라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마다 비행기, 자동차, 우주선, 함선 등으로 꾸민 곤돌라와 그에 걸맞은 의상과 분장으로 서로가 웃을 수 있게 애쓰는 니노와 이바의 행동을 사랑이 아니고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분명 곤돌라는 니노와 이바의 사랑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공간의 상징이다. 하지만 동시에 곤돌라는 니노와 이바의 활동반경을 제약하는 통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곤돌라에 탑승한 채 한없이 자유로이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지만 곤돌라의 관리인이 삼엄한 감시와 통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서 그린 관리인에게서는 인간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기대할 수가 없다. 영화가 시작하는 대목에서 곤돌라에는 죽은 이의 관이 실린다. 유족으로 보이는 늙은 여인이 죽은 이가 생전에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제복을 곱게 개어 그 관 위에 올려둔다. 늙은 여인의 상심에 공감하듯 니노는 그녀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함께 슬픔을 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진 장면에서 곤돌라에 실려 내려온 관을 장정들이 들고 갈 때 관리인이 달려와 관 위에 놓인 유니폼을 가져간다. 누군가에게 추억과 존경이 깃든 물건이 관리인에게는 비품에 불과한 것이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곤돌라의 소유권과 매출뿐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사악함에 치가 떨리는 순간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니노와 이바의 반란에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바로 매출 가방을 탈취하고 관리인 몰래 곤돌라를 운행-심지어 한밤의 파티와 협주를 곁들인-하여 관리인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핵심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관리인이 니노와 이바를 제압하려 곤돌라와 연결된 선을 끊어버렸을 때, 두 사람은 곤돌라에서 뛰어내린다. 제어를 벗어난 텅 빈 곤돌라는 관리인에게로 돌진한다. 마침내 곤돌라에서 벗어난 니노와 이바.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나란히 걸어 나가며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제아무리 찍어 내리려는 권력도 사랑이 빚어낸 과감한 행동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산골짜기 허름한 곤돌라를 사이에 두고 피어난 니노와 이바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필시 우아하고도 강력한 저항으로 기억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