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리아> 리뷰 : 마리아 VS 라 칼라스

<마리아>

마리아 VS 라 칼라스


 파블로 네루다, 재클린 케네디 그리고 다이애나 스펜서. 칠레 출신의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전기영화에 주인공들은 항상 세기를 대표하는 유명인들이었다. 이번에 그가 연출한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마리아 칼라스. 그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소프라노로 당대 오페라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다. 심지어 이번에 마리아 칼라스를 연기한 배우는 안젤리나 졸리. 안 보고 지나치기 어렵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전기영화는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의 역사와 이벤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전기영화의 구조와는 달리 우리가 모르는 자연인으로서의 그 인물을 그려내고, 관객으로 하여금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인물 내면의 비밀을 찾아내게 만든다. 특히 지난 2022년 영화 스펜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이애나 세자비의 내면을 너무 아름답고 가슴 아프게 그려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연인 마리아 칼라스의 내면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과연… 우리가 모르는 마리아 칼라스의 내면은 어떤 모양일까?

 

 감독은 화려한 무대 위 디바, 마리아 칼라스(안젤리나 졸리)를 주방 속 초라한 프라이팬 앞에서 자연인 마리아로 다시 세워놓으면서 영화를 시작한다. 초라한 주방에서 노래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유일한 관객은 음악에 문외한인 가정부 브루나뿐이다. 마리아는 감동적이라는 가정부의 대답을 억지로 받아내며 만족하는 표정과 함께 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그 시점에 그녀는 이미 오페라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영화는 마리아 칼라스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그녀 내면의 함몰을 차근차근 묘사한다.

 

 첫째로, 그녀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기능적으로만 대한다. 자신에게 칭찬 만을 해주는 가정부 브루나와 집사 페루치오. 그들은 그녀를 누구보다도 걱정하지만, 그녀에게 직언을 해주지는 못한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마리아는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은 그녀의 삶을 외롭고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필요악이었던 것처럼 묘사된다. 또한 그녀가 머무는 침실을 포함한 집은 너무나 아름다운 미술작품처럼 우아하고 고귀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 장소는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우아한 형태의 교도소처럼 묘사되었다. 이 아름다운 교도소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들이 겉으로만 아름다울 뿐, 실제적으로는 그녀를 더 불편하고 폐쇄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를 더 방어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둘째로, 그녀의 삶에는 그녀 자신이 만든 딜레마가 존재했고 그 딜레마의 작용 원리가 그녀 자신을 삶을 필연적으로 외롭게 만들었다. 무대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마리아의 확신의 찬 대답 앞에서 관객들은 ‘그렇다면 ‘무대 뒤의 자연인 마리아의 삶’은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하며 계속 그녀의 삶을 관찰하게 된다. 자신에게 있어서 무대 없는 삶은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녀의 결말을. 무대 위에서의 삶에만 의미를 두는 삶은 결국 자신을 외롭고 초라하게 만들고, 라 칼라스 뒤에 숨은 마리아의 삶은 계속 외롭고 어둡고 슬플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선택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의 삶보다는 삶의 마지막까지 무대를 그리워하고 미련을 놓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스스로 항상 주인공이어야만 했었던 그녀의 디바로서의 삶은 말년의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결국, 목소리가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디바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셋째로, 자연인 마리아와 디바 라 칼라스는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것. 영화는 초반, 중반을 지나며 자연인 마리아와 디바 라 칼라스의 끊임없는 변주를 통해 그녀의 내면을 조명한다. 자연인 마리아와 디바 라 칼라스 사이의 끊임없는 내적 갈등은 안젤리나 졸리의 내면화된 연기를 통해 사려 깊게 표현된다. 그녀의 내면적인 갈등은 끊임없는 변주를 통해 점점 더 깊게 비극의 구렁텅이로 들어간다. 마리아의 현실과 회상, 그리고 환상을 오가는 핵심에는 mandrax맨드랙스가 자리 잡고 있다. 맨드랙스는 그녀가 중독된 약물의 이름이며,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삶을 취재하러 온 기자의 이름이다. 마리아의 중독 원인인 약물의 이름을 가진 기자의 인터뷰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관객들은 현실과 환상, 그리고 과거의 일들을 온전히 구분하지 못하며 파편화되고 분절화되는 마리아의 내면을 안타깝게 계속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관객들을 매우 슬프게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거를 회상하며 괴로워하고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공상과 망상에 빠지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소프라노이자 아이콘이었던 그녀에게는 그 특수한 상황이 좀 더 공격적으로 그녀의 내면을 파괴했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러한 마리아의 상황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읽힌다.

 

 인간이란 곧 불안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통제할 수 없다. 안젤리나 졸리를 통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마리아 칼라스는 그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을 껴안고 죽기까지 달려 나간다. ‘노래는 완벽해서는 안된다.' ‘녹음된 음반이란 곧 완벽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음반을 듣지 않는다.’ 항상 무대에서 완벽을 추구했지만, 실존적으로 완벽에 다다를 수 없었던 인간. 늘 완벽을 향해 달렸지만, 그것을 견뎌낼 힘이 없었던 마리아. 그 너무나 당연한 명제 속에서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삶을 추모한다.


- 관객리뷰단 최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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