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더 이상 멈춰 있지 않아
‘나는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9월, 10월이 돼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주인공 ‘나’(에모토 타스쿠)가 하는 내레이션은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고속 성장이 무색하게 곤두박질친 경제 속 여전히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에게 지친 일본 청년들은 회피를 택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도 괜찮고, 꼭 한 가지 일에 진심을 다할 필요도 없는. 그냥 영원히 내가 밟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거라 믿으며 욕망에 충실한, 이른바 욜로(yolo)족으로 사는 것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이런 허무와 공허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남녀 셋의 이야기를 담았다. 큼직한 사건이나 갈등이 없는 단조로운 시나리오 속 어딘가 깊이 잠겨 있는 듯한 그들의 이야기는 요즘 세대에게 묘한 동질감을 준다. 허무와 무기력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마냥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모든 걸 흘려보내며 살고 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 삶의 모토로 보이는 그는 일하는 서점에 지각해도 태연하고, 잘려도 괜찮냐는 사장의 말에도 그냥 자르라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 '나'는 좀처럼 감정 변화가 크지 않다. 그의 습관은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딱 120만 세며 기다리는 것. 처음 사치코에게 호감이 있을 때도 숫자를 세며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서점에서 같이 일하는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그런 행동의 결과에 끝맺기 어려워했다. '나'랑도 사귀게 된 후에도 서점 점장과의 애인 관계를 끊지 않았고,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건 어렵다며 '나'에게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영화 내내 사치코의 자유를 핑계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나'의 태도는 사치코에게도, 보는 관객 입장에서도 헷갈리게 만든다. '나'는 사치코에게 참견하지도, 참견할 권리를 주지도 않으니까. 그저 모든 물음에 긍정하며 해당 사안에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 '나'의 반응에 사치코는 그와의 관계에 점점 지쳐간다.
'나'와 함께 생활하는 시즈오(쇼메타니 소타)는 실업자다. 일을 구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즈오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적 원조를 종용하며 "착한 아들"로 치부한다. 그러나 시즈오는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형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상황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죽인다.
영화는 표류자처럼 행동하는 인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들이 잠겨 있는 짙은 푸른색의 청춘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클럽의 푸른 조명 아래서 춤과 음악에 취해 몸을 맡기던 셋은 시즈오의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에는 평소처럼 함께 당구를 치며 놀아도 분위기 한구석이 무거웠다. 시즈오는 간병을 위해 떠났고, 사치코는 시즈오랑 사귀기로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나'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맺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영화 같은 극적인 반전과 꽉 닫히는 결말이 없다. 영화이면서도 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사치코랑 헤어진 후 그와 헤어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숫자를 센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처럼 사치코가 다가와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채 숫자를 다 세지 못하고 사치코에게 달려가 제대로 본인의 마음과 마주한다. 다 거짓말이었다고, 나는 널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 싫어 계속 회피하고 본인을 보여주기 꺼리던 '나'는 마침내 저를 둘러싼 허무와 무기력함을 깨고 나아갔다.
어쩌면 세 인물의 청춘에 깊은 무력감이 자리한 것은 그들이 속한 현실에서 묻어온 게 아닐까. '나'가 자신이 처한 자리를 박차고 뛰어간 것처럼, 영원한 여름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세 사람처럼 영화는 지금 청년들에게 어떻게든 나아갈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관객리뷰단 서수민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더 이상 멈춰 있지 않아
‘나는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9월, 10월이 돼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주인공 ‘나’(에모토 타스쿠)가 하는 내레이션은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고속 성장이 무색하게 곤두박질친 경제 속 여전히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에게 지친 일본 청년들은 회피를 택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도 괜찮고, 꼭 한 가지 일에 진심을 다할 필요도 없는. 그냥 영원히 내가 밟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거라 믿으며 욕망에 충실한, 이른바 욜로(yolo)족으로 사는 것이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이런 허무와 공허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남녀 셋의 이야기를 담았다. 큼직한 사건이나 갈등이 없는 단조로운 시나리오 속 어딘가 깊이 잠겨 있는 듯한 그들의 이야기는 요즘 세대에게 묘한 동질감을 준다. 허무와 무기력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마냥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모든 걸 흘려보내며 살고 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 삶의 모토로 보이는 그는 일하는 서점에 지각해도 태연하고, 잘려도 괜찮냐는 사장의 말에도 그냥 자르라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렇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 '나'는 좀처럼 감정 변화가 크지 않다. 그의 습관은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딱 120만 세며 기다리는 것. 처음 사치코에게 호감이 있을 때도 숫자를 세며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서점에서 같이 일하는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그런 행동의 결과에 끝맺기 어려워했다. '나'랑도 사귀게 된 후에도 서점 점장과의 애인 관계를 끊지 않았고, 사람과 사람이 헤어지는 건 어렵다며 '나'에게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영화 내내 사치코의 자유를 핑계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나'의 태도는 사치코에게도, 보는 관객 입장에서도 헷갈리게 만든다. '나'는 사치코에게 참견하지도, 참견할 권리를 주지도 않으니까. 그저 모든 물음에 긍정하며 해당 사안에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 '나'의 반응에 사치코는 그와의 관계에 점점 지쳐간다.
'나'와 함께 생활하는 시즈오(쇼메타니 소타)는 실업자다. 일을 구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즈오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적 원조를 종용하며 "착한 아들"로 치부한다. 그러나 시즈오는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형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상황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죽인다.
영화는 표류자처럼 행동하는 인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들이 잠겨 있는 짙은 푸른색의 청춘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클럽의 푸른 조명 아래서 춤과 음악에 취해 몸을 맡기던 셋은 시즈오의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에는 평소처럼 함께 당구를 치며 놀아도 분위기 한구석이 무거웠다. 시즈오는 간병을 위해 떠났고, 사치코는 시즈오랑 사귀기로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나'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맺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영화 같은 극적인 반전과 꽉 닫히는 결말이 없다. 영화이면서도 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사치코랑 헤어진 후 그와 헤어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숫자를 센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처럼 사치코가 다가와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채 숫자를 다 세지 못하고 사치코에게 달려가 제대로 본인의 마음과 마주한다. 다 거짓말이었다고, 나는 널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 싫어 계속 회피하고 본인을 보여주기 꺼리던 '나'는 마침내 저를 둘러싼 허무와 무기력함을 깨고 나아갔다.
어쩌면 세 인물의 청춘에 깊은 무력감이 자리한 것은 그들이 속한 현실에서 묻어온 게 아닐까. '나'가 자신이 처한 자리를 박차고 뛰어간 것처럼, 영원한 여름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는 세 사람처럼 영화는 지금 청년들에게 어떻게든 나아갈 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 관객리뷰단 서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