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천직은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겨쳐진 수화물마냥 ‘유보된’ 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벼락같은 사랑에 삶을 송두리째 내던진,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고 서툴기만 한 남자. 운명처럼 여겼던 여인 발레리(메르세데스 다시)가 예고 없이 떠나자, 에티엔(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의 사랑도 끝이 났다.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싱글대디로서 감당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며, 그는 원망하거나 도피하는 대신 딸 로자(셀레스트 브룬켈)를 위해 나아가기를 택한다.
영화는 에티엔과 어느덧 성장해 대학 입학을 앞둔 딸, 로자가 중심이다. 하지만 발레리의 흔적은 늘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 에티엔은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묻는 로자에게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로자의 남자친구 유세프(모하메드 루리디)가 기술했듯이, 사랑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도 창고 구석에 남아 있는 축구공처럼(영화 속 축구공은 에티엔과 발레리의 첫 만남을 암시한다), 그것은 먼지 쌓일지언정 사라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 우연히 뉴스에서 발레리의 모습을 본 에티엔이 감정의 동요를 겪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적 생각과 달리 이별은 사랑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때 나를 뒤덮은 감정이 현존에서 잠재적 상태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이러한 끝없는 유보 상태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과 같다. 그것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는, “철새”이자 “사라지는 자”인 상대방과 “칩거자, 움직이지 않는 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 않는” 나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발레리가 떠난 것을 깨달았을 때, 에티엔은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단번에 “칩거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에티엔이 사랑한 발레리는 처음부터 “철새”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연인과 아이를 두고 간 발레리를 쉽게 비난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이별이 예견되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는 발레리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었는가? 에티엔은 사랑을 ‘말하는’ 자로 늘 존재했지만, 화면 속 발레리는 대부분 에티엔의 말을 ‘듣는’ 수동적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수동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둘의 첫 만남은 풀숲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때 발레리는 시위 깃발을 만들고 있었다. 이는 그가 확실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줄 아는 진취적인 사람임을 보여준다. 또한, 시위 현장에서 에티엔을 데리고 도망친 것도 발레리다. 즉 우리는 그가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임신 소식을 전할 때 발레리의 표정과 연결되는데, “철새”는 결코 정착하지 않으며, 구속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내용에 심취해서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를 잊으면 곤란하다. 영화가 내세우는 장르가 코미디/드라마이기 때문이며, 실제로 이와 관련해 상당히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의 속에서 누벨바그를 포함해 과거 프랑스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재치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치 발레리노처럼 움직이는 에티엔의 몸놀림과 재치는 영화의 무거운 내용을 완화하며, 그의 삶이 섣부른 편견 속에서 ‘불행한’ 삶으로 재단되지 않도록 한다.
그러므로, 영화 마지막의 재회가 에티엔에게 상처로 끝나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선로가 단지 중간에서 갈라졌을 뿐임을, 그리고 과거의 망령이 자신과 로자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지 못함을 알고 있다. 오히려, 발레리에 대해 회피했던 에티엔이 점차 과거를 극복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성장하는 것은 로자뿐만이 아니다. 로자의 사랑이 우리의 풋풋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 모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성장하는 에티엔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에르완 르 뒥 감독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섬세하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에티엔과 우리의 ‘유보된’ 사랑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언제나 성장 속에 놓여 있음을 일깨운다. 이는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전하는 따뜻하고 희망 어린 견지가 얼마나 다행인가.
- 관객리뷰단 조수빈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천직은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겨쳐진 수화물마냥 ‘유보된’ 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벼락같은 사랑에 삶을 송두리째 내던진,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고 서툴기만 한 남자. 운명처럼 여겼던 여인 발레리(메르세데스 다시)가 예고 없이 떠나자, 에티엔(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의 사랑도 끝이 났다.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싱글대디로서 감당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며, 그는 원망하거나 도피하는 대신 딸 로자(셀레스트 브룬켈)를 위해 나아가기를 택한다.
영화는 에티엔과 어느덧 성장해 대학 입학을 앞둔 딸, 로자가 중심이다. 하지만 발레리의 흔적은 늘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 에티엔은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묻는 로자에게 그럴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로자의 남자친구 유세프(모하메드 루리디)가 기술했듯이, 사랑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도 창고 구석에 남아 있는 축구공처럼(영화 속 축구공은 에티엔과 발레리의 첫 만남을 암시한다), 그것은 먼지 쌓일지언정 사라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 우연히 뉴스에서 발레리의 모습을 본 에티엔이 감정의 동요를 겪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적 생각과 달리 이별은 사랑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한때 나를 뒤덮은 감정이 현존에서 잠재적 상태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사랑의 단상』에서 이러한 끝없는 유보 상태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과 같다. 그것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는, “철새”이자 “사라지는 자”인 상대방과 “칩거자, 움직이지 않는 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 않는” 나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발레리가 떠난 것을 깨달았을 때, 에티엔은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단번에 “칩거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에티엔이 사랑한 발레리는 처음부터 “철새”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연인과 아이를 두고 간 발레리를 쉽게 비난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이별이 예견되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는 발레리의 목소리를 얼마나 들었는가? 에티엔은 사랑을 ‘말하는’ 자로 늘 존재했지만, 화면 속 발레리는 대부분 에티엔의 말을 ‘듣는’ 수동적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수동적인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둘의 첫 만남은 풀숲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때 발레리는 시위 깃발을 만들고 있었다. 이는 그가 확실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할 줄 아는 진취적인 사람임을 보여준다. 또한, 시위 현장에서 에티엔을 데리고 도망친 것도 발레리다. 즉 우리는 그가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임신 소식을 전할 때 발레리의 표정과 연결되는데, “철새”는 결코 정착하지 않으며, 구속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내용에 심취해서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를 잊으면 곤란하다. 영화가 내세우는 장르가 코미디/드라마이기 때문이며, 실제로 이와 관련해 상당히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의 속에서 누벨바그를 포함해 과거 프랑스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재치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치 발레리노처럼 움직이는 에티엔의 몸놀림과 재치는 영화의 무거운 내용을 완화하며, 그의 삶이 섣부른 편견 속에서 ‘불행한’ 삶으로 재단되지 않도록 한다.
그러므로, 영화 마지막의 재회가 에티엔에게 상처로 끝나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선로가 단지 중간에서 갈라졌을 뿐임을, 그리고 과거의 망령이 자신과 로자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지 못함을 알고 있다. 오히려, 발레리에 대해 회피했던 에티엔이 점차 과거를 극복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 성장하는 것은 로자뿐만이 아니다. 로자의 사랑이 우리의 풋풋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 모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성장하는 에티엔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에르완 르 뒥 감독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섬세하고 재치 있는 방식으로 에티엔과 우리의 ‘유보된’ 사랑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언제나 성장 속에 놓여 있음을 일깨운다. 이는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전하는 따뜻하고 희망 어린 견지가 얼마나 다행인가.
- 관객리뷰단 조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