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켄슈타인>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기예르모 델 토로가 돌아왔다. <프랑켄슈타인>을 데리고. 1819년 메리 셸리가 만든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차례 영화화되었지만 이번 <프랑켄슈타인>은 좀 다르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이라 알려진 크리처의 기이한 외모라던가, 광기 어린 빅터 박사의 실험이 주가 아닌 '가족'처럼 느껴지는 둘의 관계성이 실로 흥미롭다.
일단, 이 영화는 원작 <프랑켄슈타인>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간다. 서문, 빅터 이야기, 크리처 이야기 세 장으로 나눈 원작을 고스란히 재현해 빅터의 시점뿐 아니라 크리처의 시점 역시 알 수 있도록 연출했다. 또한 기존의 머리에 못이 박히고 시푸른 색의 몸이 아닌 정말로 살을 잘라 이어 붙인 듯한, 그러나 순수한 눈빛과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는 낯을 한 색다른 크리처의 외양도 눈에 띈다. 본 관람가를 19세로 설정해 크리처를 만드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크리처의 비정상적인 힘과 재생력이 더 돋보이는 것 역시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원작의 구조를 재현한 덕에 크리처의 인상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몇 번이나 바뀐다. 서문에서는 빅터를 쫓아오는 크리처를 우연히 빅터를 구조한 북극 탐험선 사람들이 막아서는데, 아무리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가히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빅터에 의해 막 창조되어 그의 이름과 햇살, 생명을 배우는 크리처는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순진해 보였고, 어느 방앗간의 노인에게 처음으로 온정을 느끼는 크리처는 상처받은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기예르모 감독의 빅터는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인데, 어릴 적 산고로 어머니를 잃고,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그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즉 죽음을 정복하겠단 야망이 있었다. 그는 끈질긴 연구 끝에 하인리히의 지원을 받아 크리처를 만드는 연구를 순조롭게 이어가지만, 그건 오직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을 뿐 막상 자기 손으로 피조물을 만든 다음엔 목적을 잃고 공허함에 방황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느끼는 공허함과, 동시에 무책임하고 무모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란 사람을 단순히 죽음을 정복한 자로 서술하지 않고 양육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아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한데 어우러진 그야말로 광기 어린 과학자의 면모가 도드라진 것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기예르모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빅터와 크리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빅터는 이야기 내내 크리처를 이것, 저것으로 불렀으나 그가 처음 숨을 쉬며 움직일 땐 마치 제 아이처럼 보살폈고, 그를 죽이려 실험하던 탑 전체에 불을 질러놓고 저를 부르는 크리처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다시 들어가려다 다리 한쪽을 잃기도 했다. 크리처는 자신이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고, 반려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했을 땐 당신한텐 추악할지 몰라도 나는 그저 나,라고 말하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만든 빅터조차 부정하는 것에 화를 낸다. 서로를 향한 골이 깊은 애증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이 관계의 끝은 파국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둘의 결말은 예상과 다르다. 삶의 마지막에서 빅터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반성하고 크리처에게 용서를 구한다. 크리처는 자신이 품었던 희망도, 분노도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끝내 그를 용서한다. 서로를 아들과 아버지로 칭하는 둘의 모습이 이상하긴커녕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빅터와 크리처가 이야기 내내 갖고 있는 '애증' 때문이 아닐까. 크리처의 품 안에서 빅터를 보낸 후 자신들을 공격했던 선박을 밀어 바다 위로 올려주고 난 뒤 크리처는 홀로 일출을 맞는다. 태어난 이후 몇 번이나 맞는 일출이지만, 크리처는 그 어느 때보다 희망과 후련함으로 가득 차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 관객리뷰단 서수민
<프랑켄슈타인>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기예르모 델 토로가 돌아왔다. <프랑켄슈타인>을 데리고. 1819년 메리 셸리가 만든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차례 영화화되었지만 이번 <프랑켄슈타인>은 좀 다르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이라 알려진 크리처의 기이한 외모라던가, 광기 어린 빅터 박사의 실험이 주가 아닌 '가족'처럼 느껴지는 둘의 관계성이 실로 흥미롭다.
일단, 이 영화는 원작 <프랑켄슈타인>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간다. 서문, 빅터 이야기, 크리처 이야기 세 장으로 나눈 원작을 고스란히 재현해 빅터의 시점뿐 아니라 크리처의 시점 역시 알 수 있도록 연출했다. 또한 기존의 머리에 못이 박히고 시푸른 색의 몸이 아닌 정말로 살을 잘라 이어 붙인 듯한, 그러나 순수한 눈빛과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는 낯을 한 색다른 크리처의 외양도 눈에 띈다. 본 관람가를 19세로 설정해 크리처를 만드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크리처의 비정상적인 힘과 재생력이 더 돋보이는 것 역시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원작의 구조를 재현한 덕에 크리처의 인상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몇 번이나 바뀐다. 서문에서는 빅터를 쫓아오는 크리처를 우연히 빅터를 구조한 북극 탐험선 사람들이 막아서는데, 아무리 총을 맞아도 죽지 않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 가히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빅터에 의해 막 창조되어 그의 이름과 햇살, 생명을 배우는 크리처는 어린아이처럼 약하고 순진해 보였고, 어느 방앗간의 노인에게 처음으로 온정을 느끼는 크리처는 상처받은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기예르모 감독의 빅터는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인데, 어릴 적 산고로 어머니를 잃고,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그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즉 죽음을 정복하겠단 야망이 있었다. 그는 끈질긴 연구 끝에 하인리히의 지원을 받아 크리처를 만드는 연구를 순조롭게 이어가지만, 그건 오직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을 뿐 막상 자기 손으로 피조물을 만든 다음엔 목적을 잃고 공허함에 방황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느끼는 공허함과, 동시에 무책임하고 무모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란 사람을 단순히 죽음을 정복한 자로 서술하지 않고 양육자의 사랑을 갈망하는 자아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한데 어우러진 그야말로 광기 어린 과학자의 면모가 도드라진 것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기예르모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빅터와 크리처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빅터는 이야기 내내 크리처를 이것, 저것으로 불렀으나 그가 처음 숨을 쉬며 움직일 땐 마치 제 아이처럼 보살폈고, 그를 죽이려 실험하던 탑 전체에 불을 질러놓고 저를 부르는 크리처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다시 들어가려다 다리 한쪽을 잃기도 했다. 크리처는 자신이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고, 반려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했을 땐 당신한텐 추악할지 몰라도 나는 그저 나,라고 말하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을 만든 빅터조차 부정하는 것에 화를 낸다. 서로를 향한 골이 깊은 애증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이 관계의 끝은 파국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둘의 결말은 예상과 다르다. 삶의 마지막에서 빅터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반성하고 크리처에게 용서를 구한다. 크리처는 자신이 품었던 희망도, 분노도 다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끝내 그를 용서한다. 서로를 아들과 아버지로 칭하는 둘의 모습이 이상하긴커녕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빅터와 크리처가 이야기 내내 갖고 있는 '애증' 때문이 아닐까. 크리처의 품 안에서 빅터를 보낸 후 자신들을 공격했던 선박을 밀어 바다 위로 올려주고 난 뒤 크리처는 홀로 일출을 맞는다. 태어난 이후 몇 번이나 맞는 일출이지만, 크리처는 그 어느 때보다 희망과 후련함으로 가득 차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 관객리뷰단 서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