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퀴어>
늙은 사자의 서글픈 구애
사랑이라는 게 참 치사한 구석이 있다. 서로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달콤하고 찬란한 기운을 한껏 풍기며 둘 사이를 따뜻하게 감싸주건만, 사랑을 갈망하는 고독한 존재에게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냉랭할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영화를 보는 동안 류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내내 마음속을 휘저었다. 영화의 주인공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원했던 건, 단 한 가지. 사랑이었다. 애석하게도 끝내 그는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1950년대 멕시코시티의 뜨거운 여름, 갈망하는 사랑 앞에 비굴하며 애원하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는 필자의 마음을 너무도 쓰라리게 만들었다.
멕시코시티의 밤거리를 서성이는 리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사자가 연상된다. 세월의 풍파 속에 윤기 흐르는 금빛 갈기와 기개 넘치는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퍼석한 잿빛 털과 앙상한 거죽만 남은, 초라하게 나이 든 사자. 무리에서 밀려나 홀로 서성이는 늙은 사자의 말로가 리의 발걸음에 겹쳐 보인다. 얼핏 보면 고가의 양장으로 한껏 치장한 리가 노련한 화술로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상대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지긋이 응시한다거나 상대의 펜던트를 만지면서 은근하게 목덜미와 가슴을 만지는 행동)은 사실 밤을 같이 보내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리의 추태를 담아내고 있다. 향락에 빠진 도망자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잠시라도 함께 있어 줄 사람을 찾아 이곳저곳 치근대는 모습을 보기가 참 괴로울 따름이다. 여느 날처럼 멕시코시티의 환락가를 거닐던 리가 유진 앨러튼(드류 스타키)을 발견한 순간,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을 운명이라 부르고 싶게 만든다. 너바나(Nirvana)의 <Come As You Are>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닭싸움을 구경하는 군중들 사이로 서로를 인식하는 리와 유진. 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사랑이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간다.
통했다는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서로 몸을 섞으며 뜨거운 밤을 보낸 후, 물렁물렁해진 리와는 달리 유진은 차갑고 딱딱하다. 호감 가는 상대와 데이트하는 게 처음이 아닐 텐데 리는 유진과 함께할 때면 허둥지둥거린다. 연륜의 힘을 빌려 허세로 애써 숨기고 있지만 리는 유진을 보면 떨리는 게 분명하다. 나란히 앉은 극장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된) 리의 속마음이 옆에 앉은 유진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장면은 유진을 향한 리의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기대와 설렘으로 혼미한 리의 앞에서 유진은 한없이 냉담할 뿐이다. 수다스러운 리의 말에 약간의 대답만 더할 뿐 유진은 리에게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외려 유진은 리에게서 일정 거리를 벌릴 요량이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리를 보고도 유진이 대충 눈인사만 하고 다른 여성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민망하리만큼 리와 유진의 극심한 온도 차를 느끼게 만든다. 애초부터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던 걸까.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리는 언제나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유진은 콜라만 덤덤히 홀짝이고 있다. 자신을 두고 괴물이라 비난하는 사회와 자학하는 스스로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라도 리는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진은 그런 리를 보고도 취하기를 거부한다. 끝내 고독의 늪이 리의 다리를 놓아주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유진이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리는 유진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않는다. 유진의 시간을 돈으로 사겠다는 리의 제안은 리에게 남은 마지막 동아줄처럼 느껴진다. 사랑 그게 뭐라고 사람이 한없이 치졸해지는지. 그저 애처로울 따름이다.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아무 말 없이.”라는 대사는 리의 갈망을 가장 잘 드러낸다. 언어 따위가 중개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사랑)의 경지를 리는 텔레파시를 통해 메꾸어보려 하는 듯 보인다. ‘야헤’라는 식물을 흡입하면 텔레파시 능력이 배가된다는 허무맹랑한 말에 의지한 채 리를 기어이 남미 어느 깊은 정글을 탐험한다. 그런데 리의 곁에 유진이 있는 게 이상하다. 리를 두고 먼저 멕시코시티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영문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리와 유진이 함께여서. 영화의 말미, 야헤를 연구한 박사의 집에서 함께 야헤와 주술이 섞인 음료를 들이켠 리와 유진이 겪은 환각이 압권이다. 심장을 토해내고 서로의 나신이 찰흙처럼 뭉치고 뒤섞이는 모양이 공포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말하지 않고 대화하는’ 환상에 가까운 경험이 리에게 그리고 유진에게 마음의 연결되는 기적을 선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함께이길 바라는 마음에 약간의 사랑이 묻어나길, 그리하여 조금은 덜 외롭기를 조심스레 염원해 본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
<퀴어>
늙은 사자의 서글픈 구애
사랑이라는 게 참 치사한 구석이 있다. 서로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는 달콤하고 찬란한 기운을 한껏 풍기며 둘 사이를 따뜻하게 감싸주건만, 사랑을 갈망하는 고독한 존재에게는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냉랭할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서로를 외롭게 하지 않는 일
사랑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일
영화를 보는 동안 류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내내 마음속을 휘저었다. 영화의 주인공 윌리엄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원했던 건, 단 한 가지. 사랑이었다. 애석하게도 끝내 그는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 1950년대 멕시코시티의 뜨거운 여름, 갈망하는 사랑 앞에 비굴하며 애원하는 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는 필자의 마음을 너무도 쓰라리게 만들었다.
멕시코시티의 밤거리를 서성이는 리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사자가 연상된다. 세월의 풍파 속에 윤기 흐르는 금빛 갈기와 기개 넘치는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퍼석한 잿빛 털과 앙상한 거죽만 남은, 초라하게 나이 든 사자. 무리에서 밀려나 홀로 서성이는 늙은 사자의 말로가 리의 발걸음에 겹쳐 보인다. 얼핏 보면 고가의 양장으로 한껏 치장한 리가 노련한 화술로 상대를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상대의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지긋이 응시한다거나 상대의 펜던트를 만지면서 은근하게 목덜미와 가슴을 만지는 행동)은 사실 밤을 같이 보내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리의 추태를 담아내고 있다. 향락에 빠진 도망자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잠시라도 함께 있어 줄 사람을 찾아 이곳저곳 치근대는 모습을 보기가 참 괴로울 따름이다. 여느 날처럼 멕시코시티의 환락가를 거닐던 리가 유진 앨러튼(드류 스타키)을 발견한 순간, 영화는 두 사람의 만남을 운명이라 부르고 싶게 만든다. 너바나(Nirvana)의 <Come As You Are>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닭싸움을 구경하는 군중들 사이로 서로를 인식하는 리와 유진. 리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사랑이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간다.
통했다는 느낌은 착각이었을까. 서로 몸을 섞으며 뜨거운 밤을 보낸 후, 물렁물렁해진 리와는 달리 유진은 차갑고 딱딱하다. 호감 가는 상대와 데이트하는 게 처음이 아닐 텐데 리는 유진과 함께할 때면 허둥지둥거린다. 연륜의 힘을 빌려 허세로 애써 숨기고 있지만 리는 유진을 보면 떨리는 게 분명하다. 나란히 앉은 극장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된) 리의 속마음이 옆에 앉은 유진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장면은 유진을 향한 리의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기대와 설렘으로 혼미한 리의 앞에서 유진은 한없이 냉담할 뿐이다. 수다스러운 리의 말에 약간의 대답만 더할 뿐 유진은 리에게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외려 유진은 리에게서 일정 거리를 벌릴 요량이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리를 보고도 유진이 대충 눈인사만 하고 다른 여성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이 민망하리만큼 리와 유진의 극심한 온도 차를 느끼게 만든다. 애초부터 함께할 수 없는 사이였던 걸까.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리는 언제나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유진은 콜라만 덤덤히 홀짝이고 있다. 자신을 두고 괴물이라 비난하는 사회와 자학하는 스스로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라도 리는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진은 그런 리를 보고도 취하기를 거부한다. 끝내 고독의 늪이 리의 다리를 놓아주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유진이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리는 유진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않는다. 유진의 시간을 돈으로 사겠다는 리의 제안은 리에게 남은 마지막 동아줄처럼 느껴진다. 사랑 그게 뭐라고 사람이 한없이 치졸해지는지. 그저 애처로울 따름이다.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아무 말 없이.”라는 대사는 리의 갈망을 가장 잘 드러낸다. 언어 따위가 중개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사랑)의 경지를 리는 텔레파시를 통해 메꾸어보려 하는 듯 보인다. ‘야헤’라는 식물을 흡입하면 텔레파시 능력이 배가된다는 허무맹랑한 말에 의지한 채 리를 기어이 남미 어느 깊은 정글을 탐험한다. 그런데 리의 곁에 유진이 있는 게 이상하다. 리를 두고 먼저 멕시코시티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영문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리와 유진이 함께여서. 영화의 말미, 야헤를 연구한 박사의 집에서 함께 야헤와 주술이 섞인 음료를 들이켠 리와 유진이 겪은 환각이 압권이다. 심장을 토해내고 서로의 나신이 찰흙처럼 뭉치고 뒤섞이는 모양이 공포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말하지 않고 대화하는’ 환상에 가까운 경험이 리에게 그리고 유진에게 마음의 연결되는 기적을 선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함께이길 바라는 마음에 약간의 사랑이 묻어나길, 그리하여 조금은 덜 외롭기를 조심스레 염원해 본다.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