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피엔드>
요동치는 세상 위에 세워진 두 소년
십 대의 끝자락은 새벽의 푸른빛과 닮아있다.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는 하늘 아래 상쾌하고도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곧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는 그 찰나에서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하기 직전의 시간을 지나 보내는 십 대의 마지막 시절이 엿보인다. 청소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에는 밝고 활기찬 아침을 기대하면서도 적막하고 고요한 새벽에 좀 더 머물고 싶은 양가적 감정으로 휘몰아치는 혼란을 오롯이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먼저 지나온 어른들의 경험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벗들의 공감으로 잠시간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이 시기의 고뇌를 의탁할 수 없다. 하나의 인간이 독립된 개체로 자기 삶을 꾸려가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성장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지만 십 대 시절은 유달리 성장의 시기가 고역이다. 성장통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닐 것이다. 영화 <해피엔드>는 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십 대의 마지막 시절 거센 요동 속에 흔들리는 두 소년의 일상을 통해 졸업을 앞둔 고교생의 불안과 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를 조명한다. 안 그래도 성장하느라 고달픈 시기인데 세상은 청소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이 많다. 이 모든 게 다 그대들을 위해서라는 번지르르한 핑계로 세상의 입맛에 맞게 청소년에게 청소년다움을 요구한다. 성장의 시간에 당연히 학습이 필요하다지만 세상의 간섭이 정말 청소년들을 위한 배움만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가 있다. 영화의 시작, 유타와 코우는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과 함께 자유분방한 십 대 시절을 만끽하고 있다. 나이 제한 따위는 무시한 채 클럽 안으로 들어가 디제잉 공연을 즐기고, 검문하는 경찰을 따돌려 도망쳐 한밤의 도시를 내달리는 청춘들에게는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이어진 장면에서 야간 경비원의 눈을 속여 몰래 학교에 들어가서는 동아리방에서 음악과 수다에 취해 밤을 지새우고는 동이 트기 전 학교에 주차된 교장 나가이(사노 시로)의 고급 승용차를 수직으로 세워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가는 이들의 발칙한 장난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만 연달아 보여주는 이들의 불량한 모습에서 간접 경험자로서 약간의 쾌감을 잠시 느꼈으나, 이내 이들을 지켜보는 필자의 감정은 위태로움이 잠식한다. 필자의 불안을 대변하듯 영화는 마주 보고 선 유타와 코우를 진동(振動)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세워둔다. 휴대폰에 울리는 지진 경보를 확인하며 머리를 맞대고 선 유타와 코우. 학교에서 압수당한 음악 장비를 훔쳐 마련한 연습 공간, 떨어진 조명이 허공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동안 그 조명이 비춘 유타와 코우의 실루엣. 유타의 집, 흔들리는 미러볼을 사이에 두고 선 유타와 코우. 늘 함께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던 친구라는 존재에게 낯섦이 느껴지는 순간을 영화는 진동을 통해 표현한다. 불안정한 흔들림 속에서 각자가 품고 있던 고민은 나와 타인의 경계를 더욱 짙게 드리우고, 그것은 절친한 관계 사이의 틈마저도 벌려 버린다.
지금껏 함께 시간을 보내온 존재가 더 이상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을 거라는 상실감을 어떻게 해소할지 몰라 어지러운 와중에 세상의 규제와 압박은 유타와 코우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세상은 미성년(未成年)이라는 또 다른 말로 청소년을 규정한다. 세상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에서부터 훈련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실상 학교는 학생들이 세상이 굴러가는 부속품으로 기능하도록 제각기 저마다의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개성을 정리하고 재단하는 과정을 성실히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이토록 몰인정한 시스템을 두고 ‘사회화’라고 부르고 있다. 사회의 원활한 운영과 안전의 유지를 위해 학교는 교내의 미성년들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감시한다. 미성년의 비행(교장 나가이가 ‘테러’라고 규정한 자동차 사건으로 대표되는 행동)을 예방하고 처분하기 위해 학교에 도입한 인공지능 감시 프로그램 ‘파놉티(Panopty)’는 암울한 억압의 시대의 민낯을 비춘다. 오로지 감시와 통제와 처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갇혀 학교 안의 존재들은 자유를 잃어간다.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냉엄한 카메라의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증거로 기능하며 학교라는 공간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의 온정은 차갑게 식어만 간다.
규제와 제약이 정도를 넘어 가혹해지는 시대는 차별과 배제가 뒤따라 붙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까운 미래의 일본 사회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의 순간을 느끼게 한다. 독재를 꿈꾸는 한 인간이 군중을 사로잡기 위해 국가의 보위를 핑계로 억압을 시작하고 개인의 자유는 기꺼이 침해한다. 재난의 시대를 자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기 위해서라지만 결국은 지배 세력의 배만 불릴 뿐이다. 이러한 파시즘적 전체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나머지를 구분하고 숨 쉬듯 당연하게 내 편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한 무리에게 차별을 행사한다. 다채로운 인종이 모여있음에도 자국민의 소속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배제와 혐오는 지속적으로 기능한다. 시대의 억압에 대해 코우는 분노하고 유타는 외면한다. 재일한국인 코우는 4대가 일본에서 살아왔음에도 비국민(非國民) 취급을 당한다. 코우를 둘러싼 세상은 불공평과 불합리투성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우의 내면에 불안과 분노가 쌓여가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코우가 후미(이노리 키라라)를 따라 활동가 모임에 합류하여 집회에 참여했던 이유에는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코우와 달리 유타는 모른 척하는 느낌이다. 언제까지 모른 척하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마저도 모른 척하며 태생이 싱거운 사람처럼 유타는 즐거운 시간에만 몰두한다.
억압을 대하는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이지만 유타와 코우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대재난의 시대에 깊게 뿌리내린 불안과 우울은 두 소년에게 찐득하게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졸업식 예행연습 중 교장 나가이는 일전에 교장실을 점거했던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인공지능 감시 프로그램 ‘파놉티(Panopty)’를 폐지하겠다고 선포한다. 단, 교장의 애마(노란색 스포츠카)를 전복시킨 학생이 자수해야만 위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인다. 교장의 발언에 학생들이 거센 저항이 일면서 파놉티 유지 건에 대한 찬반 측 학생들 간의 격렬한 대립이 벌어진다. 코우와 친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초조한 낯빛을 내미칠 때 유타는 한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아수라장을 뚫고 연단 위에 선다. 그리고서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수를 하고는 퇴학을 당한다. 한때 동지들과 저항하기를 결의했던 코우는 여전히 자리 지키고 앉아 무사히 졸업식을 맞이한다. 시대의 어둠은 모두에게 내면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그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해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애쓰고 있음을 유타의 발걸음과 코우가 자리를 지켜선 모습에서 살짝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유타와 코우는 갈림길에서 안녕을 고한다. 두 사람의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닐지라도 두 소년이 지나온 시절의 청량한 기운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소년이 재회할지라도 그들은 저마다의 진폭으로 흔들리다가 또 다른 갈림길 앞에서 헤어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껏 나란히 걸어온 소중한 이와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다는 상실감에 서글프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삶이기에.
- 관객리뷰단 박유나
<해피엔드>
요동치는 세상 위에 세워진 두 소년
십 대의 끝자락은 새벽의 푸른빛과 닮아있다.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는 하늘 아래 상쾌하고도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곧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는 그 찰나에서 성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하기 직전의 시간을 지나 보내는 십 대의 마지막 시절이 엿보인다. 청소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에는 밝고 활기찬 아침을 기대하면서도 적막하고 고요한 새벽에 좀 더 머물고 싶은 양가적 감정으로 휘몰아치는 혼란을 오롯이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먼저 지나온 어른들의 경험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벗들의 공감으로 잠시간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이 시기의 고뇌를 의탁할 수 없다. 하나의 인간이 독립된 개체로 자기 삶을 꾸려가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성장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지만 십 대 시절은 유달리 성장의 시기가 고역이다. 성장통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닐 것이다. 영화 <해피엔드>는 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십 대의 마지막 시절 거센 요동 속에 흔들리는 두 소년의 일상을 통해 졸업을 앞둔 고교생의 불안과 이들을 둘러싼 세상의 부조리를 조명한다. 안 그래도 성장하느라 고달픈 시기인데 세상은 청소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이 많다. 이 모든 게 다 그대들을 위해서라는 번지르르한 핑계로 세상의 입맛에 맞게 청소년에게 청소년다움을 요구한다. 성장의 시간에 당연히 학습이 필요하다지만 세상의 간섭이 정말 청소년들을 위한 배움만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가 있다. 영화의 시작, 유타와 코우는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과 함께 자유분방한 십 대 시절을 만끽하고 있다. 나이 제한 따위는 무시한 채 클럽 안으로 들어가 디제잉 공연을 즐기고, 검문하는 경찰을 따돌려 도망쳐 한밤의 도시를 내달리는 청춘들에게는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이어진 장면에서 야간 경비원의 눈을 속여 몰래 학교에 들어가서는 동아리방에서 음악과 수다에 취해 밤을 지새우고는 동이 트기 전 학교에 주차된 교장 나가이(사노 시로)의 고급 승용차를 수직으로 세워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가는 이들의 발칙한 장난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만 연달아 보여주는 이들의 불량한 모습에서 간접 경험자로서 약간의 쾌감을 잠시 느꼈으나, 이내 이들을 지켜보는 필자의 감정은 위태로움이 잠식한다. 필자의 불안을 대변하듯 영화는 마주 보고 선 유타와 코우를 진동(振動)하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세워둔다. 휴대폰에 울리는 지진 경보를 확인하며 머리를 맞대고 선 유타와 코우. 학교에서 압수당한 음악 장비를 훔쳐 마련한 연습 공간, 떨어진 조명이 허공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동안 그 조명이 비춘 유타와 코우의 실루엣. 유타의 집, 흔들리는 미러볼을 사이에 두고 선 유타와 코우. 늘 함께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던 친구라는 존재에게 낯섦이 느껴지는 순간을 영화는 진동을 통해 표현한다. 불안정한 흔들림 속에서 각자가 품고 있던 고민은 나와 타인의 경계를 더욱 짙게 드리우고, 그것은 절친한 관계 사이의 틈마저도 벌려 버린다.
지금껏 함께 시간을 보내온 존재가 더 이상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을 거라는 상실감을 어떻게 해소할지 몰라 어지러운 와중에 세상의 규제와 압박은 유타와 코우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세상은 미성년(未成年)이라는 또 다른 말로 청소년을 규정한다. 세상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에서부터 훈련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막을 파헤쳐 보면 실상 학교는 학생들이 세상이 굴러가는 부속품으로 기능하도록 제각기 저마다의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개성을 정리하고 재단하는 과정을 성실히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이토록 몰인정한 시스템을 두고 ‘사회화’라고 부르고 있다. 사회의 원활한 운영과 안전의 유지를 위해 학교는 교내의 미성년들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감시한다. 미성년의 비행(교장 나가이가 ‘테러’라고 규정한 자동차 사건으로 대표되는 행동)을 예방하고 처분하기 위해 학교에 도입한 인공지능 감시 프로그램 ‘파놉티(Panopty)’는 암울한 억압의 시대의 민낯을 비춘다. 오로지 감시와 통제와 처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갇혀 학교 안의 존재들은 자유를 잃어간다.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냉엄한 카메라의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증거로 기능하며 학교라는 공간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의 온정은 차갑게 식어만 간다.
규제와 제약이 정도를 넘어 가혹해지는 시대는 차별과 배제가 뒤따라 붙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까운 미래의 일본 사회는 우리가 지나온 역사의 순간을 느끼게 한다. 독재를 꿈꾸는 한 인간이 군중을 사로잡기 위해 국가의 보위를 핑계로 억압을 시작하고 개인의 자유는 기꺼이 침해한다. 재난의 시대를 자국민들과 함께 잘 극복하기 위해서라지만 결국은 지배 세력의 배만 불릴 뿐이다. 이러한 파시즘적 전체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나머지를 구분하고 숨 쉬듯 당연하게 내 편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한 무리에게 차별을 행사한다. 다채로운 인종이 모여있음에도 자국민의 소속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배제와 혐오는 지속적으로 기능한다. 시대의 억압에 대해 코우는 분노하고 유타는 외면한다. 재일한국인 코우는 4대가 일본에서 살아왔음에도 비국민(非國民) 취급을 당한다. 코우를 둘러싼 세상은 불공평과 불합리투성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코우의 내면에 불안과 분노가 쌓여가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코우가 후미(이노리 키라라)를 따라 활동가 모임에 합류하여 집회에 참여했던 이유에는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코우와 달리 유타는 모른 척하는 느낌이다. 언제까지 모른 척하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마저도 모른 척하며 태생이 싱거운 사람처럼 유타는 즐거운 시간에만 몰두한다.
억압을 대하는 극명한 온도 차이를 보이지만 유타와 코우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대재난의 시대에 깊게 뿌리내린 불안과 우울은 두 소년에게 찐득하게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졸업식 예행연습 중 교장 나가이는 일전에 교장실을 점거했던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인공지능 감시 프로그램 ‘파놉티(Panopty)’를 폐지하겠다고 선포한다. 단, 교장의 애마(노란색 스포츠카)를 전복시킨 학생이 자수해야만 위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인다. 교장의 발언에 학생들이 거센 저항이 일면서 파놉티 유지 건에 대한 찬반 측 학생들 간의 격렬한 대립이 벌어진다. 코우와 친구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초조한 낯빛을 내미칠 때 유타는 한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아수라장을 뚫고 연단 위에 선다. 그리고서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수를 하고는 퇴학을 당한다. 한때 동지들과 저항하기를 결의했던 코우는 여전히 자리 지키고 앉아 무사히 졸업식을 맞이한다. 시대의 어둠은 모두에게 내면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 그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해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복하려 애쓰고 있음을 유타의 발걸음과 코우가 자리를 지켜선 모습에서 살짝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유타와 코우는 갈림길에서 안녕을 고한다. 두 사람의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이 아닐지라도 두 소년이 지나온 시절의 청량한 기운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소년이 재회할지라도 그들은 저마다의 진폭으로 흔들리다가 또 다른 갈림길 앞에서 헤어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껏 나란히 걸어온 소중한 이와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다는 상실감에 서글프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삶이기에.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