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그대 이름의 의미를 되새겨 보길
로맨스 장르의 거대한 한 축을 지탱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가난한 여자와 돈 많은 남자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와 배경의 차이를 두 사람의 사랑으로 극복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정통의 클리셰는 온갖 변주(남녀의 지위 전환, 시대상을 반영한 남녀의 성격 교정, 파격적인 성별 조정 등)를 해대며 지금까지도 굳건히 명맥을 이어나간다. 당연히 수요가 있기에 공급도 있는 법. 이토록 뻔한 이야기에 싫증이 날 만도 하건만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꽤나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사람들은 왜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필자의 사견임을 전제로) 의견을 말해보자면, 백마 탄 초인을 향한 희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팍팍하고 고된 나의 삶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가난한 주인공에게 쉽게 동화되어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을 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주인공(에 동화된 나)을 사랑한다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은가.
<아노라>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눈이 먼 신데렐라 스토리 마니아에게 찬물을 끼얹는 작품이다. 감독 션 베이커는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나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이번 작품을 통해 뼈아프게 드러낸다. 애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스트리퍼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클럽에서 손님으로 만난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타인)과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향락의 일주일을 보낸 두 사람은 헤어짐이 아쉬워 충동적인 결혼을 해버린다. 앞으로 애니의 인생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건만, 이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그의 부모가 결혼 무효를 종용한다. 이반네 집안의 심복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가 수하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와 가닉(바체 토브마시얀)과 함께 집안으로 들이닥치자, 이반은 줄행랑을 치고 홀로 남은 아노라는 자신의 결혼을 지키기 위해 토로스네 3인방과 이반을 찾으러 나선다. 사고 친 자(이반) 따로 있고 수습하는 자(아노라와 토노스네 수하들) 따로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촌극을 통해 감독은 돈 앞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이 군림한 현 세태를 꼬집는다.
이반이 도망치고 난 후, 이반의 집 거실에서 벌어지는 난장(亂場)을 보라. 죽기 살기로 저항하는 아노라와 그녀를 잡아두려는 이고르와 가닉 사이에서 벌어지는 혈투는 가만 보면 알맹이가 없다. 부자에게 고용된 자들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이고르와 가닉의 행동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이반이 자초한 오물을 빨리 처리하고 약속받은 보상을 받는 것에만 목적이 있어 보인다. 이고르와 가닉은 토로스의 명령 때문에 아노라를 힘으로 억누르고, 토로스는 이반네 부모의 명령 때문에 아노라를 협박하고 돈으로 매수하려 든다. 아노라의 입장에선 무관계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결혼을 취소하라며 윽박지르고 소중한 결혼반지마저 뺏어가는 비상식적인 상황을 견뎌내는 게 얼마나 두렵고 절망스러웠으랴. 그러나 이 소동의 주범 이반은 부모에게 혼나는 게 싫어서 도망을 친 것도 모자라 그새를 못 참고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술에 잔뜩 취해 휘청거릴 뿐이다. 안 봐도 뻔한 불장난 같은 사랑의 말로는 압도적으로 아노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반이) 심심해서 한 번 해 본 철없는 결혼 때문에 온갖 멸시와 힐난을 당하는 건 아노라 뿐이다. 두 사람이 한 결혼이건만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는 불행이라니, 너무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감독은 아노라의 비극을 통해 신데렐라(를 꿈꾸는 자)의 우매함을 비난하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감독은 가볍게 웃지 못할 이 풍자극을 내세워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지독한 악마에 현혹된 세상은 오롯이 부자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 돈만 있으면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교양마저 개나 줘버려도 누구 하나 함부로 하지 못한다. 부자는 더욱더 부를 축적하며 권력을 틀어쥐고, 빈자는 더욱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치욕과 멸시를 감내해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감히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해프닝이 끝나고 난 후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시간, 일말의 반전도 없었다. 냉혹한 현실은 아노라에게 만약이라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아노라는 결국 이반과 이혼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아노라는 이반에게 사과받지 못했고, 모멸감과 비참함으로 얼룩진 마음만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앞으로의 삶을 살아내야 할 아노라를 작은 배려일까. 영화의 말미, 신데렐라의 두꺼운 표피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구출하는 요상한 아니러니가 드러난다. 감독은 이고르의 입을 빌려 아노라가 지금껏 잃어버린 이름의 의미를 전달한다. 사람들도 자신도 애니(Annie)라고 불러왔기에 잊고 살던 아노라(Anora)라는 이름에는 석류, 고귀함, 빛, 아름다움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미국 사람들은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아노라’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그녀의 삶은 이름이 지닌 뜻처럼 되길 바라는 (사랑에 가까운)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노라의 삶은 한낱 금수(禽獸, Animal)처럼 취급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이고르의 차 안에서 이고르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아노라가 참으로 처량하다. 바깥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눈물이 그치면 아노라는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집으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부디 집안의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주길.
- 관객리뷰단 박유나
<아노라>
그대 이름의 의미를 되새겨 보길
로맨스 장르의 거대한 한 축을 지탱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가난한 여자와 돈 많은 남자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와 배경의 차이를 두 사람의 사랑으로 극복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정통의 클리셰는 온갖 변주(남녀의 지위 전환, 시대상을 반영한 남녀의 성격 교정, 파격적인 성별 조정 등)를 해대며 지금까지도 굳건히 명맥을 이어나간다. 당연히 수요가 있기에 공급도 있는 법. 이토록 뻔한 이야기에 싫증이 날 만도 하건만 여전히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꽤나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사람들은 왜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필자의 사견임을 전제로) 의견을 말해보자면, 백마 탄 초인을 향한 희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팍팍하고 고된 나의 삶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가난한 주인공에게 쉽게 동화되어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을 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주인공(에 동화된 나)을 사랑한다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은가.
<아노라>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눈이 먼 신데렐라 스토리 마니아에게 찬물을 끼얹는 작품이다. 감독 션 베이커는 신데렐라는 동화 속에나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이번 작품을 통해 뼈아프게 드러낸다. 애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스트리퍼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클럽에서 손님으로 만난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타인)과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향락의 일주일을 보낸 두 사람은 헤어짐이 아쉬워 충동적인 결혼을 해버린다. 앞으로 애니의 인생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건만, 이반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그의 부모가 결혼 무효를 종용한다. 이반네 집안의 심복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가 수하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와 가닉(바체 토브마시얀)과 함께 집안으로 들이닥치자, 이반은 줄행랑을 치고 홀로 남은 아노라는 자신의 결혼을 지키기 위해 토로스네 3인방과 이반을 찾으러 나선다. 사고 친 자(이반) 따로 있고 수습하는 자(아노라와 토노스네 수하들) 따로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촌극을 통해 감독은 돈 앞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돈이 군림한 현 세태를 꼬집는다.
이반이 도망치고 난 후, 이반의 집 거실에서 벌어지는 난장(亂場)을 보라. 죽기 살기로 저항하는 아노라와 그녀를 잡아두려는 이고르와 가닉 사이에서 벌어지는 혈투는 가만 보면 알맹이가 없다. 부자에게 고용된 자들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이고르와 가닉의 행동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이반이 자초한 오물을 빨리 처리하고 약속받은 보상을 받는 것에만 목적이 있어 보인다. 이고르와 가닉은 토로스의 명령 때문에 아노라를 힘으로 억누르고, 토로스는 이반네 부모의 명령 때문에 아노라를 협박하고 돈으로 매수하려 든다. 아노라의 입장에선 무관계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결혼을 취소하라며 윽박지르고 소중한 결혼반지마저 뺏어가는 비상식적인 상황을 견뎌내는 게 얼마나 두렵고 절망스러웠으랴. 그러나 이 소동의 주범 이반은 부모에게 혼나는 게 싫어서 도망을 친 것도 모자라 그새를 못 참고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술에 잔뜩 취해 휘청거릴 뿐이다. 안 봐도 뻔한 불장난 같은 사랑의 말로는 압도적으로 아노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반이) 심심해서 한 번 해 본 철없는 결혼 때문에 온갖 멸시와 힐난을 당하는 건 아노라 뿐이다. 두 사람이 한 결혼이건만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는 불행이라니, 너무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감독은 아노라의 비극을 통해 신데렐라(를 꿈꾸는 자)의 우매함을 비난하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감독은 가볍게 웃지 못할 이 풍자극을 내세워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지독한 악마에 현혹된 세상은 오롯이 부자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 돈만 있으면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교양마저 개나 줘버려도 누구 하나 함부로 하지 못한다. 부자는 더욱더 부를 축적하며 권력을 틀어쥐고, 빈자는 더욱 가난에 허덕이며 온갖 치욕과 멸시를 감내해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감히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해프닝이 끝나고 난 후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시간, 일말의 반전도 없었다. 냉혹한 현실은 아노라에게 만약이라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아노라는 결국 이반과 이혼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아노라는 이반에게 사과받지 못했고, 모멸감과 비참함으로 얼룩진 마음만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앞으로의 삶을 살아내야 할 아노라를 작은 배려일까. 영화의 말미, 신데렐라의 두꺼운 표피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린 주인공을 구출하는 요상한 아니러니가 드러난다. 감독은 이고르의 입을 빌려 아노라가 지금껏 잃어버린 이름의 의미를 전달한다. 사람들도 자신도 애니(Annie)라고 불러왔기에 잊고 살던 아노라(Anora)라는 이름에는 석류, 고귀함, 빛, 아름다움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미국 사람들은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아노라’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그녀의 삶은 이름이 지닌 뜻처럼 되길 바라는 (사랑에 가까운) 마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노라의 삶은 한낱 금수(禽獸, Animal)처럼 취급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이고르의 차 안에서 이고르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아노라가 참으로 처량하다. 바깥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눈물이 그치면 아노라는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집으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부디 집안의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주길.
-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