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자 속의 양>
한 번 더, 제대로 이별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문득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이 읽고 싶어졌다. 5~6년 전에 읽고 책장 구석에 놓아둔 소설책을 오랜만에 펼쳐 읽어 내려가다 보니, 필자가 왜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영화를 감상하고선 김초엽의 단편 소설을 떠올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상자 속의 양>과 김초엽의 소설 <관내분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죽음이 만든 이별을 남아있는 자들이 수용하는 과정과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죽은 자의 기억을 소유할 권리에 대한 담론을 제시한다. 죽은 자들은 죽음이 닥쳐온 그날로 세상과 이별이라지만, 남겨진 자들은 죽은 이와의 이별을 소화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죽은 자의 외양과 행동 양식을 복제하여 인공지능 로봇으로 만들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함께 생활하거나(<상자 속의 양>), 죽은 자의 기억과 영혼(시냅스 패턴)을 데이터로 변환시켜 도서관에 보관하는(<관내분실>) 공상과학적 상상은 결국, 상실을 견뎌내야 하는 남겨진 이들을 위한 장치이다.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며 필자는 떠나간 이의 공백을 채워줄 기술의 도입을 기대하는 한편, 애도라는 이름 아래 죽은 자의 삶을 무단으로 연명시키는 것에 우려가 엄습해 온다. 고레에다 감독 역시 그가 상상한 휴머노이드가 도입된 세상의 단면에서 이처럼 아름답고도 처연한 연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상실을 외면하기 위해 도입된 휴머노이드와의 생활을 통해 역설적으로 죽은 아들과의 이별을 직시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켄스케(다이고) 부부는 안타까운 사고로 어린 아들 카케루(쿠와키 리무)를 떠나보낸 것으로 보인다. 오토네와 켄스케의 일상은 여느 부부들처럼 평안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의 기억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부부(특히, 오토네)에게 어느 날, ‘RE-birth’라는 회사에서 무상 휴머노이드 제공에 대한 제안이 들어온다. 실제 인간과 분간하기 어려운 휴머노이드 기술에 매료된 오토네는 회사 견학 직후, 카케루를 본뜬 휴머노이드를 신청한다. 휴머노이드 카케루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고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는 아들의 부재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오토네는 아들의 사고가 있던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엄마 노부요(요 키미코)를 원망하며 아들을 마중하러 나가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켄스케는 아들을 대신 데리러 가달라던 아내의 부탁을 잊고 파친코에 심취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카케루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오토네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카케루는 더 이상 세상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고, 켄스케는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사과를 아들을 본 떠 만든 로봇에게 대신 전하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원본을 대신한 복제품과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을 시작하고 함께 슬픔을 견뎌낼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다시 태어난(rebirth)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은 관객을 향해 죽음마저 소유하려는 인간 사회의 작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설정은 휴머노이드의 항거이다. 오토네와 켄스케의 집에 오고 얼마 있지 않아 카케루는 자신과 같은 휴머노이드들과 무리를 이룬다. 카케루가 만나는 이들은 모두 이전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도망친 휴머노이드들이다. 죽은 이들은 잊지 못해서 대체품을 구매한 인간들은 상실의 아픔이 무색하게도 복제품을 지독하게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카케루와 휴머노이드 무리의 만남 사이에 등장하는 허름한 행색의 여자아이가 아프게 기억된다. 갓난아이의 유모차를 끄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어른들 뒤를 힘겹게 쫓아가던 여자아이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둔탁한 충돌음이 분명 들렸을 텐데 앞서가던 어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갈 뿐이다. 강변에 널브러진 그 여자아이가 휴머노이드 무리의 과거를 대변하듯 보인다. 그들의 상처를 보고 있노라면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인간들에게 벗어나 자신들만의 터전을 꿈꾸는 휴머노이드의 반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윽고 카케루는 휴머노이드 무리의 대장 타쿠토(히이라기 히나타)의 도움으로 자기 몸에 내장된 GPS칩을 제거하고 오토네와 켄스케의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카케루는 유리와 나무처럼 이질적인 물질이 한데 어우러진 건축을 지향하는 오토네의 작업물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과 어우러져 휴머노이드가 살아갈 공간을 구상한다. 카케루가 만든 건축 모형물을 보고 이곳에서 누구와 살 것인지 묻는 오토네에게 카케루는 ‘내 가족’과 함께 살 것이라 말한다. ‘카케루’가 더 이상 오토네와 켄스케가 바란 ‘카케루’가 아님을 선언하는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비로소 한 번 더 제대로 된 이별을 시작한다.
켄스케의 일터를 방문한 카케루가 목재를 다듬는 아키오(다나카 민)의 작업에 매료된 듯 아키오의 움직임을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아키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케루에게 작은 나무도막 하나를 건네며 ‘나무의 시간’ 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한다. 나무 조각을 귀에 대고 가만히 ‘나무의 시간’을 들어보던 카케루는 그날의 경험을 휴머노이드 무리와 함께 살아갈 나무를 고를 때에 활용한다. 오토네가 알려준 어느 숲 속에 자리한 거대한 고목에 기대어 그의 소리를 들어본 카케루는 자신들의 터전이 될 장소임을 확인한다. 카케루가 나무의 어떤 소리를 듣고 알아차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순간 카케루는 나무(자연)와 교감을 하였으리라. 유리와 나무처럼 기계와 자연은 이질적인 물질들이 서로 보완하며 상생할 그들의 미래를 기대한다. 카케루와 그의 무리들을 숲 속에 데려다주고 오토네와 켄스케는 카케루와 또 한 번 이별을 맞이한다. 물에 취약한 로봇들이 자연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그들의 터전을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오토네와 켄스케의 모습에서 독립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얼굴을 발견한다. 카케루 덕분에 두 사람이 맞이할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성인이 된 카케루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립하는 날)을 체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진다. 모쪼록 남겨진 이들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볼 수 없어 사무치게 그리울 떠나간 이의 상실을 함께 견뎌내며 그들의 남은 생을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관객리뷰단 박유나
<상자 속의 양>
한 번 더, 제대로 이별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문득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이 읽고 싶어졌다. 5~6년 전에 읽고 책장 구석에 놓아둔 소설책을 오랜만에 펼쳐 읽어 내려가다 보니, 필자가 왜 고레에다 감독의 신작 영화를 감상하고선 김초엽의 단편 소설을 떠올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상자 속의 양>과 김초엽의 소설 <관내분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죽음이 만든 이별을 남아있는 자들이 수용하는 과정과 기술의 발전이 불러온 죽은 자의 기억을 소유할 권리에 대한 담론을 제시한다. 죽은 자들은 죽음이 닥쳐온 그날로 세상과 이별이라지만, 남겨진 자들은 죽은 이와의 이별을 소화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죽은 자의 외양과 행동 양식을 복제하여 인공지능 로봇으로 만들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함께 생활하거나(<상자 속의 양>), 죽은 자의 기억과 영혼(시냅스 패턴)을 데이터로 변환시켜 도서관에 보관하는(<관내분실>) 공상과학적 상상은 결국, 상실을 견뎌내야 하는 남겨진 이들을 위한 장치이다.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며 필자는 떠나간 이의 공백을 채워줄 기술의 도입을 기대하는 한편, 애도라는 이름 아래 죽은 자의 삶을 무단으로 연명시키는 것에 우려가 엄습해 온다. 고레에다 감독 역시 그가 상상한 휴머노이드가 도입된 세상의 단면에서 이처럼 아름답고도 처연한 연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상실을 외면하기 위해 도입된 휴머노이드와의 생활을 통해 역설적으로 죽은 아들과의 이별을 직시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켄스케(다이고) 부부는 안타까운 사고로 어린 아들 카케루(쿠와키 리무)를 떠나보낸 것으로 보인다. 오토네와 켄스케의 일상은 여느 부부들처럼 평안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들어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의 기억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부부(특히, 오토네)에게 어느 날, ‘RE-birth’라는 회사에서 무상 휴머노이드 제공에 대한 제안이 들어온다. 실제 인간과 분간하기 어려운 휴머노이드 기술에 매료된 오토네는 회사 견학 직후, 카케루를 본뜬 휴머노이드를 신청한다. 휴머노이드 카케루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고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는 아들의 부재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오토네는 아들의 사고가 있던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엄마 노부요(요 키미코)를 원망하며 아들을 마중하러 나가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켄스케는 아들을 대신 데리러 가달라던 아내의 부탁을 잊고 파친코에 심취한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카케루와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오토네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카케루는 더 이상 세상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고, 켄스케는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사과를 아들을 본 떠 만든 로봇에게 대신 전하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원본을 대신한 복제품과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을 시작하고 함께 슬픔을 견뎌낼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다시 태어난(rebirth)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은 관객을 향해 죽음마저 소유하려는 인간 사회의 작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설정은 휴머노이드의 항거이다. 오토네와 켄스케의 집에 오고 얼마 있지 않아 카케루는 자신과 같은 휴머노이드들과 무리를 이룬다. 카케루가 만나는 이들은 모두 이전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도망친 휴머노이드들이다. 죽은 이들은 잊지 못해서 대체품을 구매한 인간들은 상실의 아픔이 무색하게도 복제품을 지독하게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카케루와 휴머노이드 무리의 만남 사이에 등장하는 허름한 행색의 여자아이가 아프게 기억된다. 갓난아이의 유모차를 끄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어른들 뒤를 힘겹게 쫓아가던 여자아이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둔탁한 충돌음이 분명 들렸을 텐데 앞서가던 어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갈 뿐이다. 강변에 널브러진 그 여자아이가 휴머노이드 무리의 과거를 대변하듯 보인다. 그들의 상처를 보고 있노라면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인간들에게 벗어나 자신들만의 터전을 꿈꾸는 휴머노이드의 반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윽고 카케루는 휴머노이드 무리의 대장 타쿠토(히이라기 히나타)의 도움으로 자기 몸에 내장된 GPS칩을 제거하고 오토네와 켄스케의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카케루는 유리와 나무처럼 이질적인 물질이 한데 어우러진 건축을 지향하는 오토네의 작업물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과 어우러져 휴머노이드가 살아갈 공간을 구상한다. 카케루가 만든 건축 모형물을 보고 이곳에서 누구와 살 것인지 묻는 오토네에게 카케루는 ‘내 가족’과 함께 살 것이라 말한다. ‘카케루’가 더 이상 오토네와 켄스케가 바란 ‘카케루’가 아님을 선언하는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비로소 한 번 더 제대로 된 이별을 시작한다.
켄스케의 일터를 방문한 카케루가 목재를 다듬는 아키오(다나카 민)의 작업에 매료된 듯 아키오의 움직임을 응시하는 장면이 있다. 아키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케루에게 작은 나무도막 하나를 건네며 ‘나무의 시간’ 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한다. 나무 조각을 귀에 대고 가만히 ‘나무의 시간’을 들어보던 카케루는 그날의 경험을 휴머노이드 무리와 함께 살아갈 나무를 고를 때에 활용한다. 오토네가 알려준 어느 숲 속에 자리한 거대한 고목에 기대어 그의 소리를 들어본 카케루는 자신들의 터전이 될 장소임을 확인한다. 카케루가 나무의 어떤 소리를 듣고 알아차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순간 카케루는 나무(자연)와 교감을 하였으리라. 유리와 나무처럼 기계와 자연은 이질적인 물질들이 서로 보완하며 상생할 그들의 미래를 기대한다. 카케루와 그의 무리들을 숲 속에 데려다주고 오토네와 켄스케는 카케루와 또 한 번 이별을 맞이한다. 물에 취약한 로봇들이 자연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그들의 터전을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오토네와 켄스케의 모습에서 독립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얼굴을 발견한다. 카케루 덕분에 두 사람이 맞이할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성인이 된 카케루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립하는 날)을 체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진다. 모쪼록 남겨진 이들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볼 수 없어 사무치게 그리울 떠나간 이의 상실을 함께 견뎌내며 그들의 남은 생을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관객리뷰단 박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