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사고였을 뿐>
“그래서 그 남자, 어떻게 할거야?”
복수라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인간 실존의 딜레마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상처 준 대상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 방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이지만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곧, 복수는 성공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복수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박찬욱 감독이 이 딜레마에 관심이 많고 가장 잘 다룬다. 하지만 이란에서 온 이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은 복수를 대하는 태도와 톤이 박찬욱 감독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복수심에 불타는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끝맺을까?
복수는 늘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는 카메라 앵글을 낮춤과 동시에 관객에서 질문의 시간을 선사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복수의 대상을 향해 칼날을 겨눈다. 하지만 다른 복수 영화들은 캐릭터들이 그 칼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화려하게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관객에서 그 칼자루 쪽을 내밀며 당신이라면 어떻게 휘두를 것인지 질문한다.
영화에서는 ‘사고’를 묘사한다. 그 사고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 다섯 명은 과거 정치범으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그려진다. 우연히 한 남자의 특이한 발소리를 듣게 되고, 그 남자를 자신들을 고문한 ‘가해자’로 추정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작중 피해자들은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가해자를 정확하게 식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도덕적인 물음도 관객에게 함께 제공한다. 피해자로 상정된 여러 명의 등장인물은 망각, 왜곡, 두려움, 욕망이 얽혀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끌어와 진지하게 계속 토론하지만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그 토론과 감정의 진행은 다른 복수 영화들과는 다르게 아주 느리게 진행되지만, 그 느린 진행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덕적 물음의 환경을 제공한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을 판단자이자 결정자의 자리에 앉힌다. 이제 카메라 앵글은 점점 더 관객이 직접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위치되고, 분명하게 관객의 답변을 요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느 타이밍에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언제까지 판단할 것인가. 그리고 불완전한 정보와 기억 속에서 어디까지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가.
클라이맥스 부분에는 핵심 등장인물 2명이 자신들을 고문했던 ‘가해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나무에 묶어두고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카메라는 나무에 묶인 ‘가해자’로 추정되는 자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처음에는 핵심 등장인물들이 그 대상에게 화를 내고, 때리고, 도덕적 판단을 하고, 협박을 하고, 모욕을 하는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긴 롱테이크의 장면을 집중해서 진지하게 보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정치범으로서 고문을 받고 지금까지 그 아픔을 가지고 살아왔던 자기 자신이 그 과거와, 지금까지 마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그 상처들을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결국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싸우고 대화하고 소리 지르면서 화해에 이른다.
실제 이란 사회의 억압은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을 통해 정치적인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그것이 또한 이 작품의 결을 만든다. 이란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일상에서의 불법, 그에 따라오는 폭력의 거대한 구조와는 달리 파나히 감독의 정치성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이란 사회 속의 아픔과 분열, 실재하는 폭력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태도를 진지하게 만든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는 ‘판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판단’에는 분명 피로가 따른다. 너무 피로하다. 하지만 판단의 끝에서 용서를 만났을 때 그 피로는 다시 살아갈 에너지로 변모한다. 용서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더 나아가 이란 사회의 미래가 이 영화의 결말처럼 다른 국면으로 펼쳐져 나가길 기도한다.
- 관객리뷰단 최승민
<그저 사고였을 뿐>
“그래서 그 남자, 어떻게 할거야?”
복수라는 행위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인간 실존의 딜레마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상처 준 대상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 방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이지만 그 결과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곧, 복수는 성공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복수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박찬욱 감독이 이 딜레마에 관심이 많고 가장 잘 다룬다. 하지만 이란에서 온 이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은 복수를 대하는 태도와 톤이 박찬욱 감독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복수심에 불타는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떻게 이 이야기를 끝맺을까?
복수는 늘 양가적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는 카메라 앵글을 낮춤과 동시에 관객에서 질문의 시간을 선사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복수의 대상을 향해 칼날을 겨눈다. 하지만 다른 복수 영화들은 캐릭터들이 그 칼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화려하게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관객에서 그 칼자루 쪽을 내밀며 당신이라면 어떻게 휘두를 것인지 질문한다.
영화에서는 ‘사고’를 묘사한다. 그 사고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확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 다섯 명은 과거 정치범으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그려진다. 우연히 한 남자의 특이한 발소리를 듣게 되고, 그 남자를 자신들을 고문한 ‘가해자’로 추정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작중 피해자들은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가해자를 정확하게 식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도덕적인 물음도 관객에게 함께 제공한다. 피해자로 상정된 여러 명의 등장인물은 망각, 왜곡, 두려움, 욕망이 얽혀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끌어와 진지하게 계속 토론하지만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그 토론과 감정의 진행은 다른 복수 영화들과는 다르게 아주 느리게 진행되지만, 그 느린 진행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덕적 물음의 환경을 제공한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을 판단자이자 결정자의 자리에 앉힌다. 이제 카메라 앵글은 점점 더 관객이 직접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위치되고, 분명하게 관객의 답변을 요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느 타이밍에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언제까지 판단할 것인가. 그리고 불완전한 정보와 기억 속에서 어디까지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가.
클라이맥스 부분에는 핵심 등장인물 2명이 자신들을 고문했던 ‘가해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나무에 묶어두고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카메라는 나무에 묶인 ‘가해자’로 추정되는 자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처음에는 핵심 등장인물들이 그 대상에게 화를 내고, 때리고, 도덕적 판단을 하고, 협박을 하고, 모욕을 하는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긴 롱테이크의 장면을 집중해서 진지하게 보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정치범으로서 고문을 받고 지금까지 그 아픔을 가지고 살아왔던 자기 자신이 그 과거와, 지금까지 마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그 상처들을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인물들은 결국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싸우고 대화하고 소리 지르면서 화해에 이른다.
실제 이란 사회의 억압은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을 통해 정치적인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그것이 또한 이 작품의 결을 만든다. 이란 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일상에서의 불법, 그에 따라오는 폭력의 거대한 구조와는 달리 파나히 감독의 정치성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이란 사회 속의 아픔과 분열, 실재하는 폭력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태도를 진지하게 만든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는 ‘판단’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판단’에는 분명 피로가 따른다. 너무 피로하다. 하지만 판단의 끝에서 용서를 만났을 때 그 피로는 다시 살아갈 에너지로 변모한다. 용서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더 나아가 이란 사회의 미래가 이 영화의 결말처럼 다른 국면으로 펼쳐져 나가길 기도한다.
- 관객리뷰단 최승민